[특파원 칼럼/하태원]정상외교, 멀리 보고 치밀하게

  • 입력 2009년 9월 21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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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해외순방 때 즐겨 썼던 단어 중 하나가 ‘대접’이었던 것 같다. 임기 중 27차례 해외순방을 통해 55개국을 방문했던 노 전 대통령은 현지 동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대통령으로 다니면서 대접 잘 받는다. 하지만 국내에 돌아가면 잘 안 해준다”는 말을 자주 했다. 외교대통령을 지향하며 5년간 해외순방을 23차례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정상외교를 즐겼다. 특히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뒤에는 세계의 지도자로서 한층 높아진 격(格)을 경험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해외순방과 정상회담이 잦은 편이다. 첫 정상회담을 지난해 4월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시작한 이래 일본 중국 러시아 등 4강 외교를 ‘리셋(재설정)’했고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유럽연합(EU) 등 다자외교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외교 다변화를 통한 이른바 실용외교 강화의 노력이다.

전임 정부시절 껄끄러웠던 미국과의 관계도 부드러워졌다. 20일 뉴욕에 도착함으로써 취임 후 네 번째 미국을 방문하게 됐다. 부시 전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했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도 두 번 정상회담을 갖는 등 미국 대통령과 네 번 마주 앉았다. 앞으로도 미국 등 북미지역 방문 기회는 많을 것이다. 내년 3월로 예정된 미국 핵정상회의와 3개월 후인 6월에 열리는 캐나다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도 초대장을 받아 놓은 상태다.

특히 이번 미국 방문은 세계의 가장 주요한 3대 이슈인 △경제위기 극복과 신경제질서 재편 △세계 안보질서 확립과 유엔의 역할 △기후변화협약 등 3개 주제를 동시에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외교에도 중요한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이 외국을 자주 방문하게 된 것은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국제정세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 월스트리트발(發) 금융위기로 촉발된 세계 경제질서 재편 움직임이 한 축이고 취임 후 ‘핵 없는 세상’을 구현하겠다며 핵 및 군축과 관련한 새로운 규범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의 이니셔티브 역시 활발한 정상외교의 또 다른 요인으로 꼽힌다. 달라진 한국 위상도 이 대통령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게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G8을 대체하면서 국제질서를 논의하는 새로운 규범적 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일원이 됨으로써 한국의 목소리는 한층 커졌다. 또 2차 핵실험 감행 등으로 핵보유국 지위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는 북한과 접하고 있는 한국은 오바마 대통령이 구현하고자 하는 핵 없는 세상 논의의 중요한 이해당사자이기도 하다.

급변하는 세계질서의 변화는 한국외교에도 중요한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 19세기 말 국제질서의 흐름을 깨닫지 못해 민족의 운명이 누란지위(累卵之危)에 처한 경험을 했던 한국 입장에서는 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는 것은 재삼 강조할 필요도 없는 당위다. 중요한 것은 한국외교의 운명을 결정할 최고책임자이자 정상외교의 주인공 격인 이 대통령이 얼마나 명확한 국가비전과 국가관을 가지고 임하느냐 하는 점이다. 청와대 측은 대통령이 해외순방에서 분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가며 국익 수호의 외교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이 중요하게 느끼는 것은 천리를 하루에 달리는 식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100년 앞을 내다보는 국가대계 속에서 치밀하고 영리하게 움직이는 국가지도자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태원 워싱턴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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