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죽을 만큼 해봤습니까?”

  • 입력 2009년 8월 17일 03시 02분


개그맨 김제동이 TV ‘무릎 팍 도사’에 나온 적이 있다. 그의 고민은 엉뚱하게도 야구 실력이 안 는다는 것이었다. 무명시절부터 이어진 야구 취미와 야구 스타 이승엽과의 오랜 인연이 소개된 뒤 강호동 도사가 물었다. “죽을 만큼 해봤습니까?”

잠깐 생각한 뒤 김제동이 답했다. “아니요. 방송은 죽을 만큼 해봤지만 야구는….”

방송에서 김제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죽을 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다. 야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먹고살기 위해 죽도록 할 필요가 없었기에 설렁설렁 했다. 이를 정확히 꿰뚫어본 도사는 “야구도 방송하듯이 죽을 만큼 해보라”는 식의 상투적 조언을 하지 않았다. “야구는 취미니까 그냥 즐기십쇼. 그 대신 방송은! 지금처럼 죽도록 해야 합니다.”

난데없이 무릎 팍 도사가 생각난 건 이명박 정부가 밝힌 중도실용의 길 때문이다. 대통령은 중도가 대한민국을 이끌어왔던 헌법정신, 즉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이를 더욱 발전시키려는 관점임을 분명히 했다. 사회적 약자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따뜻한 자유주의’를 추구하며 친(親)서민정책을 펴겠다고 했다.

따뜻한 얘기다. 그런데 ‘무엇으로’가 궁금하다. 따뜻한 자유주의의 필요조건이라는 윤리와 책임만으론 충분치 않다. ‘서민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껍게’ 하려면 이를 위한 정책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다. 그 때문에 세수(稅收)가 모자라면 빚을 내 장래의 국민 부담으로 떠넘기거나 돈을 찍어내 인플레이션을 비롯한 후유증을 감수해야 한다.

중도실용, ‘자기책임’ 더 강조해야

따뜻함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제 힘으로 서기보다 더 보살펴주기만 바라는 사회풍조가 더 번지면 어쩔 건지도 문제다. ‘우리가 진짜 친서민’이라고 내건 좌파세력이 보살핌만 많은 사회를 요구할 땐 어떻게 할지도 의문이다.

대통령은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중시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는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경시하는 조짐이 없지 않다. 공공부문 개혁 후퇴가 단적인 예다. MB노믹스 주창자인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은 작년 말 “공기업을 민영화하면 매각수입만 60조∼70조 원이다. 이 돈으로 재정지출을 늘리고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귀족노조, 정치노조와 전쟁을 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지금 공교육 개혁을 위해 전교조와 한판 붙기보다는 학원단속이라는 반(反)시장적 규제에 매달린다. 정부는 공기업 개혁을 죽도록 추진하기보다는 공기업 곳곳에 ‘낙하산’을 포진시켜 되레 방만을 키우고 있다.

믿기지 않지만 1920년대 미국과 아르헨티나는 경제적 라이벌이었다. 대공황 이후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부자를 때리며 재정적자와 인플레를 무시한 채 친서민 포퓰리즘 정책을 퍼부어 빈곤과 격차를 고착화시켰다. 미국 카네기재단은 최근 연구보고서 ‘회복-글로벌 금융위기와 중진국’에서 “해결책처럼 보이는 포퓰리즘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앞장서되 궁극적 결과는 투자자와 소비자의 야성(animal spirit)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는 사회가 되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는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전에, 각자 죽을 만큼 뛰는 자기책임의 원칙이 절실히 요구된다. 스포츠경기 기록이 날로 향상되는 건 선수들이 더 효율적으로 훈련하고 더 집요하게 노력하기 때문이다. 같은 일류 음악학교에서도 왜 어떤 학생은 더 뛰어난지 연구했더니 네댓 살 때 비슷하게 음악을 시작해 18세에 입학하기까지 보통학생은 혼자 3420시간을 연습한 반면 잘하는 학생은 5301시간을, 탁월한 학생은 7410시간을 연습했다는 결과가 있다.

연습이 쉽고 재미있을 리 없다. 죽을 만큼 하지 않으면 실력은 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승엽과 달리 김제동의 야구는 제자리다. 그렇다고 김제동이 야구도 방송처럼 목숨 걸고 하긴 힘들다. 그랬다간 우리는 김제동의 개그를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

‘한 만큼 가져야’ 성숙한 민주사회

선택과 집중은 그래서 중요하다. 성취는 자기책임 아래 선택하고 집중해 이룰 일이지 누가 이뤄줄 수는 없다. 암만 따뜻한 나라라도 7410시간 연습한 1등과 3420시간 연습한 꼴찌를 똑같이 대우하기 시작하면 그 나라에서 세계 1등은 아예 안 나온다. 대학입학사정관제가 100% 신입생을 뽑아도 마찬가지다. 서민 부모 밑에서 태어난 환경을 원망하며, 보이지도 않는 잠재력만 믿고 졸릴 때 다 잔 학생이 좋은 대학에 철썩 합격한다면 그게 외려 불공평하다.

이 정부가 중도실용 정부로 간판을 바꿔다는 건 좋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 성장과 복지의 상생을 위해선 ‘한 만큼 가진다’는 자기책임 또한 강조돼야 한다. 세상을 설렁설렁 사는 건 자유이되 죽을 만큼 한 사람과 똑같은 평등은 없어야 성숙한 민주주의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