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클린턴 보기가 부끄럽다

  • 입력 2009년 8월 8일 02시 59분


인권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의 윤현 이사장은 요즘 가슴이 답답하다. 132일째 북한에 억류 중인 개성공단 근무자 A 씨를 구해내기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실적이 신통치 않기 때문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미국인 여기자 2명을 북한의 손아귀에서 구출한 뒤에는 윤 이사장의 한숨이 더 늘었다.

우리 인질에 무관심한 ‘김정일 知人들’

시민연합은 A 씨 석방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결집하기 위해 지난달 16일 홈페이지(www.nkhumanrights.or.kr)에서 온라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대학생 자원 봉사자 20여 명의 도움을 받아 서울 명동과 광화문 주변에서 두 차례 거리 캠페인도 했다. 시민연합은 “A 씨 석방과 재발방지를 위해 힘을 모아 달라”고 서명을 호소하지만 누리꾼과 행인들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광화문광장 개장 이후 서울 도심으로 몰리는 인파를 겨냥해 6일 세종로사거리 동화면세점 앞에서 거리 캠페인을 벌였지만 대부분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 자원봉사자들을 허탈하게 했다. A 씨 장기 억류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큰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렇게 냉담하다.

정부와 정치권도 윤 이사장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외교통상부는 “우리가 A 씨 문제를 떠들수록 북한은 큰 약점을 잡은 것으로 판단하고 버티게 된다”며 서명 캠페인에 거부 반응을 보였다. 시민연합은 지난달 24일 친박연대 송영선 의원과 함께 국회 의원회관 로비에서 A 씨 석방 촉구 결의대회를 갖고 국회의원과 보좌관의 서명을 받았다. 한나라당 정옥임 의원, 자유선진당 이진삼 의원이 정당을 대표해 참석했지만 민주당은 동참을 거부해 초당적인 행사가 되지 못했다. 그런 민주당이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이후 A 씨 억류의 책임을 정부에 돌리며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윤 이사장은 “민주당이 차라리 억류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었으면 좋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친분으로 따지면 한국에는 클린턴 전 대통령보다 더 큰 활약을 해야 할 후보자가 많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인이 됐지만 김 위원장을 만난 또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이 있다. 전직 통일부 장관을 비롯해 김 위원장을 만난 장관급 인사도 수두룩하다. 김 위원장과 안면이 없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미국인을 구출하는데 김 위원장과 구면인 우리나라 전직 고위 인사들은 왜 A 씨를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나. 김 위원장을 만났던 어느 누구도 “우리 국민을 풀어 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클린턴 전 대통령을 보고 부끄러워하며 반성해야 할 사람들이다. 남북 정상회담이 모든 남북문제를 해결하는 계기가 될 것처럼 요란을 떨었지만 가장 기본적인 인도적 현안도 해결할 수 없는 불임(不姙)의 이벤트였다는 사실만 확인됐다.

북의 反人道에 ‘소름 끼치는 침묵’

시민연합은 15일까지 서명을 받아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는 팩스로,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에는 우편으로 보낼 예정이다. 7일 현재 서명자는 2000명 남짓이다. 북한이 호의적 반응을 보이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서명자 수가 많을수록 압력은 커질 것이다. 서명자가 최소한 수만 명으로 늘었으면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임동원 정세현 이종석 등 역대 통일부 장관의 이름이 서명자 명단에 들어간다면 더 낫지 싶은데, 이들은 관심조차 없는 게 아닌가.

시민연합의 서명 호소문은 마틴 루서 킹의 다음과 같은 어록으로 시작된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최대의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었다고.” 북한의 도발과 잘못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침묵하는 국민이 많으면 정부가 아무리 확고한 대북정책과 원칙을 세워도 북한발(發) 음모와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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