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가업 콤플렉스

  • 입력 2009년 5월 13일 02시 54분


‘가족’만큼 따뜻한 말은 드물다. 가족을 떠올리면 사랑, 존경, 자기희생, 화목과 같은 긍정적인 단어가 자동으로 꼬리를 물고 연상 작용을 일으킨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용어가 유독 부정적으로 쓰이는 분야가 있다. 기업 경영 분야다. 우리나라에서 ‘가족경영’은 대개 청산해야 할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취급된다. ‘가족경영’에 부정적인 색깔을 입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족벌경영’이라는 훨씬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가족경영은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낳고, 이는 한국 대기업에 대한 국제적인 평판 저하로 이어진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여기에는 외환위기 이후 외국의 투기성 금융자본과 이에 동조했던 일부 시민단체의 선전공세가 큰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가족경영=전근대적’이라는 주장은 과연 국제적으로 검증된 것일까.

지난주 미국의 컨설팅업체인 레퓨테이션 인스티튜트(RI)가 세계에서 가장 평판이 좋은 200대 다국적기업을 선정해 발표했다. 존슨&존슨이나 구글과 같은 초우량기업들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한 기업은 뜻밖에도 이탈리아의 초콜릿 브랜드인 페레로였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누텔라’, ‘페레로 로셰’, ‘틱택’과 같은 빅 히트 브랜드를 가진 것으로 유명한 기업이다. 이 중 ‘페레로 로셰’와 같은 브랜드는 코카콜라보다 ‘중독 팬’이 많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페레로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도 전 세계 기업 중 가장 뛰어난 평판을 얻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탈리아 본사에 문의해본 결과 페레로 측은 주저하지 않고 3대에 걸친 ‘가족경영’을 꼽았다. 페레로는 이탈리아 서북부에서 조그만 빵 가게를 운영하던 피에트로 페레로와 그의 가족이 1946년 설립했으며, 그 경영권이 피에트로의 아들인 미켈레를 거쳐 현재 그의 손자들인 피에트로와 조반니에게 넘어가 있다.

가족경영이 ‘존경받는 기업’ 페레로를 일궈낸 인과관계에 대한 페레로 측의 설명은 이렇다. “대부분의 제과업체들은 새로운 상품을 출시하고 제품에 변화를 주면서 단기 판매실적에 비중을 두고 있다. 하지만 우리 회사의 경영진은 모두 페레로 패밀리의 일원으로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는 데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있다. 이 때문에 페레로의 각 브랜드는 25∼60년에 이르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일반 초콜릿과 달리 명품 초콜릿에는 복잡한 제조비법이 숨어 있다. 우리는 가족경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비법의 유출로부터도 자유롭다.”

RI에서 가족기업의 약진은 페레로의 사례뿐만이 아니었다. 페레로에 이어 2위를 한 스웨덴의 가구브랜드 이케아 또한 사적이고, 가족적이며, 불투명한 지배구조로 유명한 비상장 가족기업이다.

물론 페레로와 이케아의 사례만 가지고 가족경영체제가 전문경영인 시스템보다 우월하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반대 또한 진실과 거리가 멀다는 단적인 반증은 될 수 있다. 주주가치와 투명성을 중시하는 미국식 지배구조가 절대선(善)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는 지금 세계 도처에 널려 있다. “주가와 단기실적에만 급급해 장기투자를 게을리했다”는 뼈저린 자기반성이 여기저기에서 나온다.

‘가족경영은 전근대적이라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라.’ 세계경제가 위기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값비싼 교훈 중 하나가 아닐까.

천광암 산업부 차장 im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