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공존하고 싶다는 바이러스의 고백

  • 입력 2009년 4월 30일 02시 57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28일 돼지인플루엔자에 감염된 미국 환자로부터 추출한 바이러스(H1N1)의 전자현미경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28일 돼지인플루엔자에 감염된 미국 환자로부터 추출한 바이러스(H1N1)의 전자현미경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전 세계가 돼지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인간이 바이러스를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은 공생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본보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 창궐한 2003년 바이러스의 가상 고백을 실었다(본보 2003년 12월 30일자 A24면 참조). 2009년, 바이러스가 다시 인간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말을 들어보면 왜 ‘공생’인지 알 것이다.》

“우리가 모두 나쁘진 않아…극히 일부만 사람 괴롭히지
의학발달로 힘 약해졌지만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을거야”

두렵니? 그러나 우리를 욕하지는 마. 나? 그래, 바이러스야. 세계보건기구(WHO)가 대유행(팬데믹)을 우려하고 있을 정도니 우리 막내인 신종 돼지인플루엔자의 활약이 대단한 것 같아. 우리를 미워해도 좋아. 그러나 그 전에 이야기부터 들어 봐.

○ 너희들이 바이러스를 알아?

1347년 이탈리아에서 원인 모를 전염병이 발생했어. 온몸에 검은 반점이 생긴다고 해서 흑사병이라고 불렀지. 이탈리아 전역을 초토화하고 프랑스로 퍼졌어. 영국과 북유럽으로 북상했어. 3년간 유럽 인구의 30% 이상이 죽었지. 인간은 20세기에야 병의 원인이 페스트균이란 사실을 밝혀냈어.

페스트균은 우리의 친척일 뿐이야. 우린 세균과 많은 점에서 다르거든. 우선 크기가 세균보다 훨씬 작아. 우리 중 가장 덩치가 큰 두창(천연두) 바이러스가 300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에 불과해. 세균은 핵과 미토콘드리아가 있어 독자생존이 가능하지만 우리는 핵이 없어 다른 생물(숙주)에 기생해야 살 수 있지. 다른 점은 또 있어. 세균은 항생제로 치료하지만 우리는 백신으로만 치료할 수 있다는 거야.

우린 지구상에 약 4000종이나 있어. 그중 인간과 연관이 있는 친구들은 약 500종? 우리도 정확히는 몰라. 변이가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야.

○ 바이러스의 ‘짱’ 인플루엔자

의사들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가장 두려워한다더군. 제대로 본 거야. 우리의 ‘짱’이 바로 인플루엔자거든. 이 친구는 사람과 돼지, 조류에 각각 유행하지만 서로에게 침투하지 않는 A형,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B형, 사람에게 유행할 수도 있지만 해를 끼치지 않는 C형으로 나뉘지. 항원의 종류에 따라서 헤마글루틴(H) 16종, 뉴라미니다아제(N) 9종이 있어. 조합하면 어마어마하게 많아. 인간에게 주로 유행하는 것은 H3N2를 비롯해 30여 종이야.

우리의 ‘짱’ 인플루엔자는 1918년 스페인 독감(최대 5000만 명 사망), 1957년과 1968년 홍콩 독감(100만 명 이상 사망) 등 10∼40년을 주기로 팬데믹을 일으킨 후로 잠잠해. 요번에 모처럼 기지개를 켠 거야. 아참. 인간들은 타미플루라는 약물로 이 친구의 위력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틀렸어. 아직 이 약으로는 우리를 100% 막을 수 없지. 아마 70∼80%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거야.

“인플루엔자가 가장 무서워
1918년 스페인독감 이후 10~40년 주기 팬데믹”

○ 세력은 커졌지만 파괴력은 작아져

인플루엔자의 활동 영역은 과거보다 훨씬 넓어졌어. 인간들의 교류가 활발해진 덕분이지. 중세 유럽 흑사병의 주범은 쥐였어. 그러나 이탈리아의 쥐가 아니었어. 당시 소아시아의 상인들과 무역을 하던 이탈리아 상선에 페스트균을 보유한 쥐들이 몰래 탔던 거야. 요즘 인간들은 글로벌, 글로벌하더군. 과거보다 우리의 운신 폭이 훨씬 넓어진 거야. 그런데 이번 돼지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자가 200명이 채 안 돼. 이쯤에서 고백해야 할 것 같아. 그래, 우리의 파괴력이 많이 약해진 거야.

인간들의 의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어. 초기 대응도 신속하더군. 멕시코처럼만 한다면 우리들이 활동하기에 아주 좋지. 그 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인간의 몸에 침투하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더라고. 그런 경우가 아니면 솔직히 팬데믹 가능성은 낮은 게 사실이야.

○ 인간과의 공존

1969년 미국 공중위생국장 윌리엄 스튜어트란 인간은 “이제 전염병은 대부분 끝이 보인다”고 말했어. 우린 코웃음을 쳤지.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야. 인간은 영원히 우리를 이길 수 없어. 우리 중 ‘최고참’이 감기야. 가장 오래됐지. 그런데 감기를 100%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아직까지 개발하지 못했잖아? 우리의 생명력은 우리가 생각해도 대단해. 달라진 환경에 즉각 변이를 일으켜 적응하지. 설령 지구에 핵폭발이 일어나도 우리는 살아남을 거야.

우리도 인간과 공존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헤르페스 알지? 많이 피곤하면 입술 주변에 작은 수포가 생겼다가 몸이 괜찮아지면 사라지지? 그게 바로 헤르페스야. 인간이 유일한 숙주지. 그래서 절대 치명적인 공격을 하지 않아. 숙주가 치명상을 입으면 우리만 손해지 뭐.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도 비슷해. 1981년 발견됐을 때만 해도 감염자가 거의 다 죽었지만 지금은 수명이 5∼10년 늘었고, 바이러스 독성도 30∼40% 약해졌지. 공존을 택한 거야. 반면 에볼라는 멍청해. 이 친구는 파괴력이 너무나 강해 감염된 인간들을 1주일 안에 모두 죽여 버렸어. 그 결과 자신들도 멸종되다시피 했지.

스페인 독감의 항원은 ‘H1’이었어. 90년이 지난 지금 H1항원은 인간에게 큰 해를 가하지 않아. 90년간 함께 살면서 적응한 거지. 돼지의 H1과 인간의 H1항원은 원래 같은 조상이었지만 서로 다른 생물에 기생하다 보니 성격이 달라진 것뿐이야. 요번 만남은 90년 만의 상봉인 셈이지. 당분간 적응하지 못하겠지만 곧 공존하게 될 거야.

“다함께 살고 싶지만
인간이 계속 환경파괴하면 변종 만들어 인체 공격”

○ 인간의 자업자득

다만 알아둬야 할 게 있어.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파괴가 우리를 자극한 경우가 많다는 거야. 1976년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발견된 에볼라는 최초 숙주가 원숭이인지, 박쥐인지 불분명해. 다만 환경 파괴로 변종 바이러스가 생겨 인간에게 전염된 건 확실해. 에이즈도 아프리카 카메룬 지역 침팬지들의 병이었어. 그러나 인간들이 침팬지를 무분별하게 잡는 과정에서 에이즈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아왔지. 우리 바이러스에게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또 하나 얘기해줄까? 조류인플루엔자나 돼지인플루엔자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집단사육이야. 생산량을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늘리기 위한 인간의 욕심이 우리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다는 거야. 인간부터 자성해야 하지 않을까?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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