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패밀리가 사는 세상

  • 입력 2009년 4월 12일 19시 59분


“사내로 태어나 성공혀야 허는디, 두 길이여. 하나는 합법적으루다 나라 대통령이나 회사 오너가 되는 거이고, 둘로는 조직으 보스가 되는 거인디….”

12년 전 이맘때 공연됐던 연극 ‘남자충동’의 한토막이다. 당연히 주인공은 조직폭력배 보스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금잔디의 유약한 아빠로 나온 안석환 씨가 그땐 알파치노 뺨치는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그가 끔찍하게 위하는 단 한 가지가 패밀리였다.

노무현타운만 ‘사람 사는 세상’?

느닷없이 옛날 연극이 떠오른 건 노건평 씨가 일깨워준 패밀리의 가치 때문이다. 그는 추부길 전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에게 “패밀리는 서로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 쪽 패밀리엔 박연차도 포함시켜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로열패밀리를 뜻했겠지만 국민의 귀엔 영락없는 조폭패밀리로 들린다.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다. 선거라는 합법적 민주주의 장치를 통해 대통령으로 뽑아줬더니, 그쪽 패밀리들은 조직의 보스라도 된 양 포장마차를 지켜준 대가로 자릿세를 뜯는 조폭같이 온갖 세금과 규제로 국민을 쥐어짰다. 그렇게 채운 나라곳간에서 509억 원의 예산을 쌈짓돈처럼 넘겨받아 경남 김해시 진영읍과 봉하마을 ‘노무현타운’에 썼거나 쓸 예정이었다. ‘(박)연차 수당’사건만 안 터졌으면 화포천 생태공원에 60억, 봉화산 웰빙숲에 30억 등 몇십억 원 단위가 가볍게 들어갈 뻔했다.

어쩌면 노무현 전 대통령 형제는 패밀리끼리 도움을 주고받는 건 수사할 ‘깜도 안 되는’ 일이라고 믿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족 간에 돈이 오가도 그 정도면 증여세를 내야 하는 게 보통 패밀리의 세상이다. 게다가 박 씨는 노 패밀리를 도운 대가로 경남 진해시 옛 동방유량 터의 고도제한 해제로 400억 원의 차익을 거저먹는 등 민간인은 까무러칠 특혜를 받았다. 연구개발에 힘쓰면서 법 잘 지키는 성실한 기업이 박 씨만큼의 지원을 받았다면 우리나라는 노 정부 5년간 세계평균을 밑도는 경제성장률에서 헤매지도 않았을 거다.

제 가족만 중하고 남의 가족은 만만한 밥으로 여기는 노 패밀리의 가족관을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라고 한다. 이탈리아 남부가 북부보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더딘 것도 가족끼리 봐주는 문화 때문이라는 연구에서 나온 용어다. 믿을 건 가족뿐이라고 여기는 세상엔 시민의식도, 법치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러고도 노 전 대통령은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특권, 유착이 해소되고 권력에 의한 청탁이 없는 사회문화를 가져야 한다, (신뢰의) 사회적 자본을 충실하게 만들어야 된다, 진보적 시민주의가 앞으로 개인적으로 추구해야 될 정치적 노선이라는 재임 중 강연을 올려놨다. 퇴임 후 정치까지 시사한 발언이다. 작년 말 정치학회가 ‘노무현 타운’에서 그를 인터뷰했을 때 “모든 사람이 ‘왕의 권리’를 나눠가지는 진보를 추구해야 한다”고 한 수사(修辭)가 가증스럽다. 그의 말 따로 행동 따로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패밀리의 특권을 휘둘러온 위선(僞善)은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용납하기 어렵다.

위선 전람회는 계속된다

보통 패밀리가 이런 혼돈의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로열패밀리의 말장난에 속지 말고 행동을 따라 하는 거다. 미국식 모델을 개탄하는 노 전 대통령의 입 대신, 아들을 미국 스탠퍼드대에 보내 경영학석사 과정을 공부시키는 행동을 유심히 봐야 한다는 얘기다.

인류가 번성하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은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고 지배계급은 그들만의 이익을 꾀해왔다. 들키느냐 안 들키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좌파나 우파나 인간 본성은 마찬가지다. 지금은 신자유주의의 ‘부도덕성’이 드러났다며 정부 개입을 환영하는 흐름이지만 정부 역시 사람이 모인 집단이다. 정부 정책의 상당부분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거나 ‘나는 빼고’일 수 있다. 프랑스가 유독 평등을 강조하는 이유가 그 나라가 평등하지 않다는 걸 지배계급이 너무나 잘 알아서라는 해석도 있다. 평등이 중요하다고 말이라도 해야 피지배계급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 딸들은 사립학교 보내면서도 공립학교의 책무성을 높이는 개혁을 추진하는 버락 오바마는 차라리 양심적이다.

둘째는 패밀리의 가치를 합법적으로 활용하기다. 경제가 뒷걸음치고 사회적 안전망이 부족해도 이탈리아가 돌아가는 이유는 정부가 못하는 사회적 기능을 가족이 해주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위기라 해도 패밀리가 뜨면 솟아날 구멍은 있다. 다만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2002년)고 했다가 “집에서 한 일이고 나는 몰랐다”(2009년)고 표변해도 배신감 느끼지 말 일이다. 어차피 못난 국민은 로열패밀리의 위선 전람회를 보고 있지 않은가.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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