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닥터 디스카운트

  • 입력 2009년 3월 27일 02시 58분


5월 1일부터 3년 임기가 시작되는 경만호 대한의사협회 신임 회장 당선인의 공약을 훑어보는데 ‘뜬금없이’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라는 말이 떠올랐다. 네이버에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치면 이런 사전적 설명이 나온다. ‘한국 기업 가치에 비해 주가가 저평가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말. 내재 가치가 높은 기업들도 기업 지배구조 등 투명성의 문제로 인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의사들은 한국 사회의 대표적 ‘상위 1%’ 집단이다. 대학입시만 봐도 그렇다. 작년에 수능시험을 본 학생이 대략 55만 명. 1%면 5500명인데, 로스쿨 정원이 2000명이고 의사시험인 국시(國試) 합격생이 매년 3000명 조금 넘는 정도니까 의사와 변호사를 합쳐 ‘상위 1%’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요즘처럼 ‘의대로, 의대로’ 쏠리는 현상이 계속된다면 의사집단은 상위 1% 안에서도 ‘우월적 상위 1%’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잘난 집단인데 뜬금없이 웬 디스카운트냐고?

꼭 20년 동안 기자생활을 하면서 ‘잘난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고, 겪어봤다. 세상의 평가와 필자의 임상평가 사이엔 괴리가 많았다. 예컨대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의 공안검사들이 그랬다. 그땐 공안검사들이 검찰 내에서도 잘나고, 잘나가는 사람들이었지만 내 눈엔 ‘정말 고등교육을 받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황폐한 지성의 소유자들이었다. 경만호 당선인의 공약이나 당선 소감은 그보다 더 실망스럽다. 그는 일할 줄 아는 의협을 만들고, 의사와 의협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정권 핵심과 소통하는 정치력을 발휘하겠다고 했다. 이력서를 보면 이명박 대통령 후보 상임특보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다고 하니 나름대로 의협 운영의 자신감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그의 공언처럼 정권 핵심과 소통하면 의협의 위상은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실세 의협’으로 대정부 발언권도 높일 수 있을 테고…. 그런데 과문(寡聞)한 탓인지 의사의 위상과 정권 핵심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연결이 안 된다.

캠프 특보나 인수위 자문위원이야 이름만 걸어놓은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는데 뭘 그런 걸 가지고 시비냐고 할지 모르겠다. 또 어차피 협회라는 게 ‘정치’하는 곳인데 뭘 그 정도 말을 가지고 정색하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료계 인사는 “의사들이 순진해서 그렇다”고 했다. 대학에 이판(理判·학자)이 있고 사판(事判·행정가)이 있듯이 의학계도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입맛은 씁쓸하다. 경 당선자의 극히 원시적이고, 절제되지 않은 욕망 표출이 혹시 우리 의사 양성 과정의 근본적인 철학 부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의 언격(言格)이 누구 말처럼 ‘순진해서’ 그런 게 아니라 혹시 의사직업훈련원쯤 돼버린 우리 의과대학의 현실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하는 우울한 상념까지 든다.

‘닥터 디스카운트’라는 말은 그런 의구심과 상념이 만들어낸 필자의 사적인 조어(造語)에 불과하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처럼 제발 일반화의 길을 걷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도 담겨 있는 말이다.

김창혁 교육생활부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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