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장훈]2030세대 ‘생산의 권력’ 쌓으라

  • 입력 2009년 3월 13일 02시 58분


심각한 경제위기의 와중에도 대학은 어김없이 개학을 했고 캠퍼스에는 설레는 봄기운이 꽃바람처럼 몰려온다. 그런데 필자는 지난 10여 년 사이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광경을 이번 봄에 접하게 되었다. 적지 않은 학생이 매시간 강의실 앞 복도에 정연하게 줄지어 서서 무언가를 기다렸다. 가만 살펴보니 다음 시간 강의실의 좋은 좌석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줄이었다. 기성세대의 눈에는 낯설고 신기하게 보일 수 있는 이 장면을 지켜보다가 바로 여기에 우리 사회의 희망의 싹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필자가 젊은이들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 요즘 기성세대가 보여주는 무기력 때문이다. 1, 2년이면 해소될 경제위기라기보다는 80∼100년 주기의 거대 전환의 길목에 서 있는 요즘, 우리가 목격하는 모습은 그동안 한국을 이끌어 온 모델 혹은 가치관의 파산이다. 우리를 세계 10대 교역국가로 끌어올렸던 1960년대식 성장론이나 한국을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로 이끌어 온 1980년대식 민주화론은 오늘날 ‘위기와 전환의 시대’에서 속수무책임이 드러나고 있다.

성장론-민주화론 이젠 안통해

먼저 1960년대식 성장론을 보자. 지난 대선을 계기로 화려하게 복귀하여 정치권력의 요소요소를 장악한 60, 70대가 떠받드는 성장론은 세 개의 핵심 기둥 위에 서 있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관, 경제와 사회 전반을 이끌어가는 강한 정부의 리더십, 그리고 근면 성실의 개인윤리. 하지만 이러한 기둥은 오늘날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0년대에 한국의 국가전략이란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는 이념과 질서에 순응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미국이 제공하는 수출시장, 기술이전, 안보우산을 바탕으로 우리는 ‘수출입국’을 이루고 아시아의 용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이후의 세계에서 파산하는 것은 단지 AIG나 GM 같은 미국의 거대 기업만이 아니다. 자유주의를 외치던 미국이 금융기관을 국유화하고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의 유혹에 시달리면서 세계표준으로서 미국의 지위도 함께 흔들리고 있다. 따라서 미국식 세계표준에 익숙한 한국의 성장론자 역시 좌표를 잃고 표류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강한 정부의 역할 역시 흔들리기는 마찬가지다. 박정희 시대에 이룩한 한강의 기적은 강한 정부가 사회를 이끌고 억누르고 채찍질하면서 쌓아올렸지만 오늘날의 정부는 엄청나게 성장한, 크고 강한 사회와 마주하고 있다. 지난해 촛불시위에서 확인했듯이 정부가 사회를 대하는 방식은 이제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유연하게, 쌍방향 소통을 통해 사회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열린 자세는 성장론자에게 결코 쉽지 않은 변신이다.

이른바 386세대가 이끌어 온 민주화의 이데올로기 역시 파산 위기에 몰리기는 마찬가지다. 독재 권력에 맞서 자유화를 이끌었던 민주화론은 사실 기본적 민주주의가 갖추어진 1987년 이후부터 줄곧 방황해왔다고 할 수 있다. 386세대의 저항의식과 도덕주의는 민주화를 향한 투쟁과정에서는 매우 유효했지만 민주주의의 적이 사라진 순간부터 제 역할을 모색하는 데에 실패해왔다. 결국 386세대는 (이 세대에 속해 있는 필자로서도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별다른 독자적인 비전을 내놓지 못한 채 윗세대와 아랫세대에 끼여 있는 형편이다.

지금의 2030세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유복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성장해 온 세대이다. 이들은 어느 세대보다도 세계화되어 있지만 동시에 미국의 힘을 상대적으로 바라볼 여유를 가진 집단이다. 이들 세대는 치열한 경쟁사회를 거치면서 성장하여 개인주의에 기울어 있지만 동시에 엄숙함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갖춘 창의적인 세대이다.

미래 이끌 담대한 비전 찾아야

필자는 이들 2030세대가 무엇보다도 저항의 권력보다는 생산의 권력을 쌓아가는 데에 관심을 갖기를 기대한다. 실업대란과 무한경쟁에 대한 분노를 길거리에 쏟아내기보다 낡은 가치관을 대체할 새로운 비전을 찾는 데 몰두하길 기대한다. 성장론과 민주화론을 넘어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갈 담대한 구상을 만드는 데에 젊은이들이 중심 역할을 하기 바란다. 그 같은 노력은 대학 강의실에서, 기업의 일터에서, 인터넷 토론방에서 꾸준히 성실하게 추구해야 한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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