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정위용]걷는 한국 - 뛰는 중국 - 나는 베트남

  • 입력 2009년 3월 2일 03시 00분


‘뛰는 상인 위에 나는 상인.’

최근 모스크바 북동쪽 재래시장인 이즈마일롭스키 시장을 둘러본 인상이다. 이 시장은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상품이 1200만 모스크바 시민을 상대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곳이다.

지금 이곳을 주름 잡는 상인은 중국인이다. 이들은 베이징(北京)에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달려와 의류 가전제품 잡화를 대량으로 풀어놓으며 시장을 지배해 나가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 생활하던 한국 교민 몇 명이 틈새를 파고들었지만 중국 상인의 저가 공세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들 중국 상인의 생활은 모스크바에서 거의 밑바닥 수준이다. 시장 주변 두 평짜리 단칸방에서 세 가족이 칼잠을 자고 난 뒤 재래시장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는다고 했다.

그래도 매장에 나온 중국인들은 생글생글 웃는다. 몸은 고단하지만 물건 파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표정이다. 의류 매점의 한 상인은 유창한 러시아어로 “양말 하나 팔아 1루블(약 40원)이라도 남는다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7600km를 달려온다”고 말했다.

중국 상인 이전에 이 시장을 누비던 상인들은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등지에서 입국한 발트 해 보따리 장수였다. 발트 해에서 온 상품은 대부분 북유럽에서 재수입한 것으로, 종류가 다양하지 못한 데다 가격도 높았다. 발트 해 상인 한두 명이 골목길에서 엉금엉금 기었다면 중국인들은 대로에서 뛰는 셈.

그런데 이런 중국 상인의 시장 지배도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제를 시장에서 몰아내는 천적 제품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상품을 위협하는 대표적 제품은 베트남 사람이 만드는 옷과 가죽 제품이었다. 베트남 상인은 모스크바 근교 아파트 지하실에다 공장을 차려놓고 현지 도매상에게 주문을 받고 있다. 이렇게 나온 제품은 중국 상품보다 더 쌀 뿐만 아니라 현지 소비자 취향에도 맞아 주문량이 크게 늘고 있다.

한 베트남 상인은 “중국 상인이 국경에서 통관을 기다리거나 열차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동안 우리는 계절상품을 한 달 먼저 시장에 내놓는다”고 말했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베트남인들이 가격을 크게 내려 중국 상인이 울상을 짓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베트남 상인은 뛰고 있는 중국 상인 위를 날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이들의 경쟁은 저가 재래시장에서만 벌어지는 ‘그들만의 리그’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업하기 어려운 국가로 알려진 러시아에서 이들이 보여준 치열한 경쟁 정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장사 기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눈여겨볼 만했다.

중국인들은 “지난해 9월 금융위기 이후 국가가 수출장려금을 올려줘 위험 부담이 줄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베트남인들도 “사업이 망해 고국에 돌아가도 사업 손실을 회복할 만큼 두둑한 자금 지원을 받는다”고 말했다.

모두가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다는 얘기였다. 수출 사양 품목이나 기업이라고 해서 지원을 끊거나 혜택을 크게 줄인 한국과는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었다.

특히 비즈니스 환경이 다른 지역보다 열악한 러시아에 나와 사업을 벌이는 한국 중소기업을 보면 이런 생각이 더 든다.

모스크바 근교에서 플라스틱 공장 용지를 찾고 있는 한 교민은 “해외로 나온 중소기업은 내수에만 몰두하는 회사보다 자금지원 혜택이 적다”고 말했다. 수출길이 갈수록 막히는 시기에 외롭게 해외시장에 뛰어든 한국 중소기업이나 상인들에게도 날개를 달아주었으면 한다.

정위용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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