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선규]장기기증은 사랑의 기적

  • 입력 2009년 2월 19일 02시 58분


1996년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 주최로 제1회 ‘장기(臟器) 주간’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의 사회를 맡으면서 장기기증 운동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도대체 가족도 아니고 잘 알지도 못하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선뜻 자신의 장기를 내어줄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지 궁금했다. 대부분의 장기기증은 사후(死後)에 이뤄지지만 내 몸, 또는 그 일부를 나눠준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생명 살릴 수 있는 주인공

행사장에는 장기기증자, 수혜자, 시술을 담당하는 의사가 모여 있었다. 기증자 가운데는 자신의 신장 두 개 가운데 하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신장 하나로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얼굴에서는 고통도, 자만도, 연민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화한 미소와 기쁨만이 흘러 넘쳤다. 진정한 나눔의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장기를 나눠주는 사람도 이렇게 많은데 죽은 다음에 못하겠는가.’ 이런 생각에서 장기기증 서약을 하고, ‘골수’로 알려진 조혈모세포 기증 등록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본부의 1호 조혈모세포 기증 등록자로 기록됐다고 한다. 사실 장기 및 골수 기증을 선뜻 결정하게 된 것은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 내 자신과 모든 것을 바꾼다고 해도 절대 아깝지 않은 딸 때문에 생명의 소중함과 살아 있음의 기쁨을 사무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1993년 당시 3세였던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응급실에 실려 갔다. 정신없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더는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대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절망에 빠져 있기를 몇 시간, 아이의 몸에 따스한 기운이 돌았고 다시 생명을 찾았다. 기적이라고밖에 설명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신(神)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도 기적과 같은 일을 만들 수는 없을까. 장기기증을 고민하면서 이 일이야말로 가망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내 몸을 통해 기적과 같이 다시 생명을 허락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주변 사람에게 장기기증을 권할 때 농담처럼 ‘재활용론’을 펴곤 한다. “하물며 물건도 재활용하는데 왜 쓸 만한 몸을 재활용 안 하십니까. 숨은 멎었지만 아직도 쓸 만한 구석이 있는데 왜 땅 속에, 또는 불 속에 넣습니까. 여러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증명해 보일 기회를 왜 그저 버리십니까.”

장기기증을 서약한 뒤 좋은 습관도 얻게 되었다.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게 됐다. 술이나 담배 등 몸에 좋지 않은 습관은 버리고 규칙적으로 운동도 한다. 내가 혼자 쓰고 갈 몸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넘겨줘야 하는 몸이라고 생각하니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추기경 본받아 관심 확산되기를

하지만 이런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기기증은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사건이 있을 때 ‘반짝’ 늘었다가 다시 잠잠해지곤 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죽은 몸이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칼을 대는 것에 반감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특히 살아 있을 때 기증해야 하는 조혈모세포는 적당한 기증자를 찾고도 막상 기증을 약속한 사람이 수술 직전에 마음을 바꿔 이식을 기다리던 환자가 사망하는 일도 본 적이 있다.

장기기증은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다. 대단한 철학과 결심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지위나 재산에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각막기증으로 장기기증 등록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고 한다. 이 관심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유지되길 소망한다.

최선규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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