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제동]몽마르트르 언덕서 잠시 허탈했지요

  • 입력 2009년 2월 13일 02시 59분


신문과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한강을 바라볼 때마다 가끔 문화라는 말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대중문화, 문화센터, 우리의 문화, 문화적인 삶…. 과연 문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제가 쓰고 있는 지금 이 글도 저의 문화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싫든 좋든 제가 살아온 세월과 그 안에서 체득된 습관들이 쓰는 획과 획마다 묻어있을 테니 말입니다. 세계를 뒤흔드는 거대한 흐름뿐 아니라 그저 살아온 누군가의 작은 발자국조차 문화일 테니 말입니다. 물론 그 작은 움직임들이 거대한 흐름 또한 만들어냈겠지요. 문화 역시 사람의 것이라, 사람처럼 생명력을 가지며 때론 발전하고 쇠퇴하며 변화해나갈 테니까 말입니다.

한때 뒷골목 문화였던 힙합이 이제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화합의 장이 되기도 하고, 하류층이나 추는 음탕한 춤이라 배척받았던 탱고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 중의 하나로 손꼽힙니다. 공부는 안하고 길바닥에서 춤이나 춘다고 어른들의 혀 차는 소리를 듣던 우리의 아이들이 이제는 발레리나와 사랑에 빠진 비보이의 이야기로 세계의 무대에서 사랑을 받으며 훌륭한 외교사절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지요. 홍콩 영화나 흉내 낸다고 자라서 뭐가 될 거냐고 걱정을 듣던 아이들은 이제 그들이 만든 드라마와 영화로 한류라는 거대한 문화적 줄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세계인을 모으는 ‘문화의 힘’

그러고 보면 문화의 힘은 곧 삶의 힘, 지금과는 또 다른 것을 갈망하는 끈질긴 생명력인 것도 같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 영향을 받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더 아름다워지듯이 문화도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 안에서 뜨겁게 끓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거지요. 그렇다고 나는 이것을 사랑하니 너희도 이것을 사랑하라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저 나는 이것을 사랑하니, 내가 사랑하는 그것만 알아달라는 몸짓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게 나 역시 네가 사랑하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몸짓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해금과 기타가 서로의 줄을 인정하고, 상쇠와 비보이가 서로를 인정하여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내지 않았겠습니까.

방송 때문에 촌놈이 여러 나라를 많이 다녔습니다. 파리의 에펠탑도 가 봤고요, 몽마르트르 언덕도 올라봤습니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도 보았고 영국의 템스 강도 봤지요. 그때마다 저 역시 다른 문화에 대한 동경과 갈망으로 설레기도 했지만 곧 그런 생각에 잠겼던 것 같습니다. 정말 이곳들이 그렇게나 유명해야 할 만큼 아름다운 것일까. 남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질투하는 삐딱한 마음인가 싶어 제 마음을 단속하고 다시 한 번 센 강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우리의 한강보다 더 아름답다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낙동강과 섬진강, 이 강산에 있는 어느 강 하나 그곳보다 덜 아름다운 것은 없었지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랐을 때는 여기가 진짜 그 몽마르트르 언덕이냐고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말로만 듣던 곳에 온다는 설렘과 높은 기대치 때문에 더 허탈한 마음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때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사계절 모습을 달리하며 갈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 정말이지 아름다운 남산의 산책길이었습니다.

왜 이토록 아무렇지도 않은 곳을 그토록 많은 사람이 찾고 싶어 할까, 왜 더 아름다운 우리의 것은 알려지지 않았을까. 비슷한 기대와 실망을 몇 번 되풀이한 후에야 저는 문화의 힘을 떠올렸습니다. 그렇게나 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몽마르트르와 센 강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렇게나 많은 미국 드라마에서 자유의 여신상이나 센트럴파크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남산-섬진강이 ‘명소’ 되려면

바로 문화였습니다. 소설이, 영화가, 연극과 그림이 사람들을 그곳으로 이끌었을 테지요. 제가 몽마르트르 언덕에 실망했던 건 미처 그 문화의 힘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력도 재능인 것처럼, 헤어짐도 사랑의 일부인 것처럼, 그 장소가 쌓아온 문화의 역사 또한 그곳의 아름다움의 일부였던 거지요.

그래서 저는 이제 그런 꿈을 꿉니다. 영화 속 지구를 구하는 슈퍼 영웅들이 한강 위를 날기를, 삼각산 정상에서 어떻게 인류를 구원할지 고민하기를, 낙동강을 배경으로 이별하고 섬진강에서 재회하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세계를 감동시키기를, 우리의 워낭 소리가 세계를 울려 어떤 물질보다 무서운 ‘정’의 힘으로 다 함께 울었으면, 그래서 문화의 힘으로 그려진 지도를 들고 우리나라로 찾아오기를.

새삼 백범 김구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김제동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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