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육정수]공권력은 왜 존재하는가

  • 입력 2009년 1월 31일 03시 00분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Rules of Engagement·교전수칙)’라는 미국영화가 있다. 미 해병 특공대의 미 대사관 방어 작전과 민간인 사망 사건을 둘러싼 법적 논란을 소재로 하고 있다. 서울 용산 참사를 한창 수사 중인 검찰이 경찰 특공대의 과잉 진압 여부를 판단하는 데 이 영화를 참고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의 무대는 예멘 주재 미 대사관. 대사관 앞에서 연일 격렬한 반미(反美) 시위가 벌어진다. 시위 군중의 규모도 엄청나지만 주변 건물에서 대사관을 향해 총탄이 마구 날아든다. 마침내 미 해병 특공대가 대사관 옥상에 투입돼 대사 가족과 대사관 직원들을 헬리콥터로 탈출시킨다. 저격수의 총탄에 특공대원 몇 명이 쓰러지자 특공대는 시위대를 향해 기관총 세례를 퍼붓는다. 민간인 83명이 희생된 뒤 상황은 끝난다.

사건이 외교 문제로 번져 특공대를 지휘한 해병 대령이 군사법원에 회부된다. 비무장 민간인을 살상(殺傷)할 수 없게 돼 있는 미군 교전수칙을 위반한 혐의다. 그런데 대사관 옥상에서 시위상황을 찍은 비디오테이프가 백악관에 넘겨진 뒤 불태워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비디오테이프는 지휘관의 사격 명령을 옹호해줄 증거물이었다. 미국은 대(對)아랍 관계 때문에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휘관은 옛 전우인 법무관의 변호 덕분에 무죄평결을 받는다. 대사 가족 등 미국 시민들을 살리고, 국가 상징인 성조기(星條旗)를 마지막 순간까지 보호했으며, 부하들을 구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 인정된 것이다. 군인의 임무에 충실했던 지휘관에게 민간인 살상의 결과를 책임 지울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용산 사건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인명 피해를 부른 원인과 배경, 경찰과 군의 역할 차이 등을 고려할 때 맞비교는 무리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공권력 경시풍조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지금은 그 점을 냉철하게 점검해 봐야 할 때다. 6명의 귀중한 생명이 희생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생명을 빼앗은 화재의 원인조차 정확히 규명 안 된 상태에서 경찰과 정부에만 책임을 돌리는 일부 분위기는 비이성적이다. 과잉 진압, 강경 진압 탓으로 몰아가지만 검찰 수사로는 화재의 원인이 오히려 철거민 측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공권력이라면 무조건 적대시하는 사회 일각의 잘못된 의식에 문제가 있다. 경찰의 존재 이유는 치안질서를 유지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있다. 시위가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인명 살상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하지만 시위대가 화염병 등 무력을 동원해 경찰의 질서유지 및 진압 작전에 저항하거나 일반 시민에게 위해(危害)를 줄 때는 다르다.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에는 정당한 임무수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인명 피해에 대해서는 면책이 옳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만약 경찰 특공대의 진압작전이 늦어졌다면 철거민 시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됐을까. 4층 건물 옥상에서 큰길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거나 새총으로 유리구슬과 골프공을 마구 쏴 차량과 행인들을 위협하는 일이 방치됐을 경우도 생각해 봐야 한다. 단순히 시위 시작 25시간 만에 진압작전을 벌인 사실만으로 경찰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만큼 긴급 상황이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야당들이 진상 규명도 끝나기 전에 ‘과잉 진압’ ‘살인 정권’의 낙인을 찍는 데 앞장서고 특검과 국정조사라는 무기를 들이대며 검찰을 협박하는 것도 온당치 않다.

용산 참사는 검찰 수사와는 상관없이 이미 정치적 사건으로 변질됐다. 용산 시위 현장 일대와 희생자 시신이 안치된 순천향병원은 ‘제2의 촛불’ 진원지가 되고 말았다. 용산 사건을 어떻게 매듭짓고 ‘제2의 촛불’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공권력의 생사(生死)와 이명박 정부의 성패(成敗)를 가를 시금석이 될 것이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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