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효종]‘용산 참사’ 政爭아닌 수습을

  • 입력 2009년 1월 22일 02시 55분


성숙한 사회라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참사가 일어났다. 서울 용산 재개발 농성장에서 벌어진 대참사 앞에 우리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모두가 힘겨운 겨울나기를 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이성과 상식이 지배하는 ‘성숙한 사회’가 아니라 언제라도 대형 참사가 일어날 수 있는 ‘위험 사회’인가, 아니면 많은 사람이 화가 나 있어 누구라도 불만 붙이면 폭발하는 ‘앵그리(angry) 사회’란 말인가.

‘재발방지’ 여야-정부 머리 맞대야

더욱 유감스러운 일은 벌써부터 이번 참사를 두고 바라보는 시각과 해법이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격렬한 쟁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야가 상반되는 진단과 처방을 내놓는 모습부터가 볼썽사납다. 경찰의 강경진압에 항의하는 촛불집회가 벌어지고 있다. 이는 정도(正道)가 아니다. 참사는 불행한 일이지만 어떻게 이성적으로 수습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의 성숙도가 평가받게 마련이다.

정치권은 이번 사태를 보면서 어떻게 수습할까 하며 공동지혜를 발휘해야지 이 화롯불에서 누가 뜨거운 밤톨을 꺼낼지를 놓고 정치적 손익계산을 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우리 정치에 저질스러운 일이 많지만 국가적인 불행이 생겼을 때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상황을 연출하는 모습처럼 저질스러운 일도 없다. 건물에 불이 났을 때 누가 불을 냈는지를 따지기보다 사람을 구하고 불을 끄기 위해 달려가는 소방관을 보라. 우리 정치권은 큰소리치며 실체 없는 책임공방에 함몰되기보다 소방관의 사명감과 직업의식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여야와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이런 비극이 재발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하는 일이 우선적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바른 대책이 나오려면 비극의 원인을 규명하는 눈이 정확해야 한다. 백조의 흰 털을 가지고 덜 희다고 한다거나 까마귀의 검은 털을 가지고 더 검다고 한다면 어떻게 흑백을 가릴 수 있겠는가. 이번 참사에서도 덧칠이나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진실과 책임소재를 밝히고 이에 따라 관련자에 대한 엄중한 문책이 있어야 한다.

정부의 행위는 ‘의도’보다는 ‘결과’로 가늠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불법에 대해서는 강경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섬세함과 정교함이 결여된 법집행은 금물이다. 섬세함이 없는 단호함이나 유연성이 없는 강경함은 공권력의 도덕성보다는 비정함을 보여줄 뿐이다. 철거민이 화염병과 시너를 동원해 격렬한 시위를 벌인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 저항의 범주를 넘어서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찰의 무모한 대응까지 면책되지 않는다. 시위가 극렬할수록 불상사가 발생할 가능성을 두고 치밀하게 대응했어야 하는데 시위대 해산에만 급급했던 것은 아닐까.

고단한 서민에 위안과 희망 주길

현 시점에서 정부가 반드시 유의해야 할 문제가 또 있다. 서울만 해도 219개 구역에서 재개발과 재건축 사업이 계획돼 있다. 결국 용산 철거민과 공권력이 충돌했던 것과 비슷한 문제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철거민은 현실적인 이주대책을 요구하지만 법으로 규정된 내용을 넘어선다는 점이 문제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정부가 법질서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하면서도 동시에 철거민을 극한투쟁으로 이끌었던 소외감과 박탈감을 다독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고단한 삶에 위안과 희망을 주는 것은 정부의 책무다. 정부는 엄부자모(嚴父慈母)와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 법을 집행할 때는 엄하더라도 동시에 어려운 계층의 눈물을 닦아주는 ‘따뜻한 손’이 필요하다. 이번 사태에서 정부로서는 마땅히 어려운 이의 눈물을 닦아줄 ‘따뜻한 손’을 갖고 있었는지 돌아보는 자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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