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양섭]통곡의 벽과 알아크사

  • 입력 2009년 1월 16일 02시 58분


#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지난주 빛바랜 사진 하나를 실었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후세인 요르단 국왕,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고쳐 매는 모습이었다.

증오와 피로 얼룩진 요즘 가자지구를 떠올리면 과연 그랬을까 싶은 장면이다. 원수들이 한방에 모여서 구원(舊怨)을 접고 어떻게 상생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1995년 어느 날의 모습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불려온 가나안에 오랜만에 평화의 기운이 싹트던 때였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4차에 걸친 아랍과 이스라엘 간 중동전쟁 등 총성과 돌팔매를 잠시나마 잊고 지내던 휴식 같은 시기였다.

# 2000년 9월 말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아랍국의 반대에도 이슬람교에서 세 번째로 성스러운 장소인 알아크사 사원 방문을 강행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격렬하게 항의했고 여러 명이 다쳤다. 다음 날 유대교의 성지 ‘통곡의 벽’을 찾아 기도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성벽 위 알아크사 사원에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돌을 던졌다. 이스라엘은 이를 유혈 진압했다. 제2의 인티파다(반이스라엘 무장봉기)의 시작이었다.

1990년대 라빈이 암살되고, 후세인 국왕과 아라파트가 병사하면서 영웅들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 뒤 많은 게 달라졌다. 자살폭탄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고, 다시 보복이 이어지면서 폭력이 일상화됐다.

그런 탓에 양쪽 모두 강경파가 득세했다. 이스라엘 강경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에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높이 10m의 콘크리트 벽에 다중 철조망으로 이뤄진 불신의 벽이다. 벌써 300km 이상이 세워졌다.

이 같은 분리·봉쇄 정책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가난해지면서 경제가 무너졌다. 그 틈새를 하마스가 파고들었다. 한때 독립투쟁을 앞세웠던 주류 정파 파타당은 사리사욕만 채우는 집단으로 변모하면서 신뢰를 잃어갔다. 그 대신 하마스는 의료시설과 학교를 세우는 등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들은 부패하지 않았으며, 신선했다. 그 신뢰의 힘은 급기야 2006년 가자지역 총선에서 하마스를 압도적인 제1당으로 밀어 올렸다. 외부에서는 폭력을 일삼는 이슬람 과격파로 낙인찍힌 단체였지만….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하는 단체가 가자지구에서 실권을 잡자 이스라엘은 더 단호해졌다. 또 이번 가자 공격 이후 외부의 비판이 거세지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으로 더 똘똘 뭉치고 있다. 유명 인사들은 위험지대를 방문해 격려하고, 민간인들도 언덕에 올라가 망원경으로 가자지구를 공습하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한다. 이를 두고 일부 해외 언론에서 ‘수치의 언덕(Hill of Shame)’이라고 꼬집는 데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이스라엘은 이번 기회에 아예 하마스의 뿌리를 뽑으려 하고, 하마스는 가자의 민심과 우호적인 세계 여론을 등에 업고 격돌하고 있다. 그 와중에 1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동생과 자식 등 가족을 잃은 그들의 가슴에 또다시 증오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다. 가자 사태는 이제 전 세계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윤양섭 국제부장 laila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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