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31세 골방도사 경제대통령’ 누가 만들었나

  • 입력 2009년 1월 10일 03시 04분


경제전문 기관들도 예측하기 어려운 경제 위기의 공포 속에서 거침없는 경제 진단으로 대중적 인기를 끌던 ‘미네르바’(필명) 박모 씨는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두들기던 31세 무직 청년이었다. “외국의 금융기관에 근무한 적이 있다”는 자기소개도 거짓이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금융기관과는 거리가 먼 두 곳의 제조업체에서 근무한 것이 경력의 전부였다. 그는 여동생과 단둘이 사는 집에서 경제 관련 책과 웹 사이트를 서핑해 얻은 얕은 지식으로 ‘미네르바 신드롬’의 허상을 만들어냈다.

인터넷은 본래 검증되지 않은 쓰레기와 알짜 정보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공간이다. 인터넷 덕택에 ‘똑똑한 군중(smart mob)’이 출현했다는 이론도 있지만, 두뇌와 이성이 마비된 천박한 세대가 나왔다는 비판도 있다. 인터넷 속엔 ‘집단 지성’과 ‘디지털 광기’가 공존한다. 인터넷에서 바른 정보와 허위 정보를 제대로 가려내는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 교육이 강화돼야 할 이유다.

신원도 확인되지 않은 누리꾼이 얼굴 없는 ‘경제 대통령’으로 부상한 일련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이성보다는 감성, 과학보다는 근거 없는 선동에 휘둘리기 쉬운 우리 사회의 심각한 병리현상이 엿보인다. 지식인과 전문가들의 자성이 필요한 대목이다. 박 씨가 인터넷에 올린 내용 중 몇 가지 예측이 운 좋게 맞았다고 하지만 경제를 잘 아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조악한 점이 많았다. 그런데도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침묵하거나 무기력했다.

심지어 몇몇 지식인들은 미네르바 신드롬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김대중 정권 초기에 3개월 조금 못 되게 경제수석비서관을 했던 성균관대 김태동(경제학) 교수는 박 씨를 “내가 본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며 칭찬했다. 김상종 서울대(생명과학부) 교수는 “시민논객의 분석이 정부보다 더 많은 신뢰를 얻고 있는 이상 미네르바와 같은 시민지성은 계속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누리꾼들로부터 ‘미네르바만큼도 예측을 못하느냐’는 조롱을 당하면서도 경제현상을 왜곡하는 허상의 논객을 방치한 책임이 크다. 전 경제부처가 아마추어 선동꾼에게 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씨의 글이 대중에 영향력을 미칠 지경에 이르러서는 정부 정책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는 작업에 나섰어야 했다.

일부 좌파 매체는 박 씨가 검찰에 체포되자 ‘정부를 불편하게 만든 인터넷 논객을 검찰이 처벌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위축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의견을 비쳤다. ‘정부가 금융기관과 기업에 달러 매수 금지 명령을 내렸다’는 박 씨의 글은 시장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한다. 익명성에 숨어 사인(私人)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허위 사실을 유포해 국가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일을 막을 법적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책임도 크다. 박 씨는 체포될 때까지 다음 ‘아고라’에 500여 건의 글을 올렸다. 아고라는 허무맹랑한 논리로 미국산 쇠고기를 광우병 쇠고기로 몰고 가 우리 사회를 3개월 넘게 혼란에 빠뜨린 진원지이다. 아고라는 광우병 쇠고기 촛불 시위 이래 근거 없고 편협한 주장으로 사회갈등을 조장한 사례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영향력이 막강해진 포털을 이렇게 무책임한 공간으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박 씨의 실체가 밝혀진 뒤 상당수 국민은 신흥종교 교주에게 사기당한 듯한 심정을 느끼고 있다. 미네르바로 대표되는 ‘골방 도사’의 논리에 누리꾼이 환호하고, 사회혼란으로 이어지는 사태가 재현되지 말란 법이 없다. 허상과 선동의 논객이 다시 출현해 국민을 미혹에 빠뜨리지 않도록 인터넷을 이성과 과학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가꾸기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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