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칼럼]마음속 따뜻한 불씨를

  • 입력 2008년 12월 1일 02시 59분


러시아인들은 꽃을 무척 좋아한다. 경축 행사나 남의 집을 방문할 때는 물론이고 개학날 선생님께도 꽃을 선물한다. 꽃값이 유독 비싼 추운 나라에서 생필품도 부족한 주제에 곧 시들고 말 꽃을 산다는 것은 낭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결국은 거품으로 돌아간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오래 강요된 절제와 체제 전환기의 극심한 궁핍 속에서도 꽃 한 송이를 선물함으로써 물질적 결손과 정신적 곤혹을 일거에 상징적으로 거부하고 손상된 자존심을 낭만으로 승화시키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꽃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한 사람들은 존엄성을 지닌 대등한 인간으로서 서로의 마음속에 따뜻한 불을 지피는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지금 다가오는 겨울은 러시아의 겨울 못지않게 혹독하고 길 것 같은 조짐이다. 자연적 계절로의 겨울이야 그곳처럼 길고 혹독할 리가 없겠지만 인간의 집단적 오만과 탐욕과 안일함이 초래한 경제 현상으로의 겨울은 이제 겨우 시작되는 단계이고 그 겨울이 얼마나 혹독할지를 우리는 아직 가늠도 제대로 못한다.

최근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세계적 재정 파탄의 여파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애써 낙관론을 펴려는 정부 측 이야기다. 하지만 세계공황의 한파가 불어닥치기 전부터도 우리 사회는 이미 우리만의 큰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혹독한 불황의 겨울 나려면

북한의 핵 개발로 귀착된 햇볕정책과 점증하는 북한 당국의 오만, 대북 정책을 둘러싸고 깊어만 가는 나라 안 갈등의 골, 악화되어 가는 국제 경제적 지위와 환경, 인구의 고령화와 노숙인의 증가, 정부의 위신 추락과 공권력의 무력화, 자원 부족과 환경 파괴의 문제 등….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한시라도 편히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의 운명을 걸메고 있는 여야 정치권은 내외적으로 중첩된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직시하고 국민이 납득하고 호응할 만한 대응책을 내놓기 위해 온 힘을 모으기는 고사하고 권력 외에는 아무 일에도 관심이 없다는 듯 평상시같이 고질적 정쟁에만 몰두한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지 정치인이 아님이 확인되는 것은 불행히도 언제나 나라가 어려울 때다. 정치인은 한바탕 잔치를 벌인 뒤 달아나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계속 살아야 하므로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 혹독한 추위를 극복하는 길은 더 열심히 뛰는 것이지만 뛸 힘도 없이 쓰러지는 사람을 위해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점검하는 일도 독재사회가 아닌 민주사회에서는 그에 못지않게 필수적이다. 다수의 국민이 생계 안전선 밖으로 밀려 나가며 사회공동체에 대한 기대를 접고 불법적 자구책을 찾아 나선다면 경제가 발전할 수 없음은 물론 시민사회로 존속하기 어렵게 된다. 그 때문에 어느 나라에서나 노약자나 실업자 보호를 위한 적극적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대개 풍요의 시기가 아니라 위기의 한가운데서이다.

복지사회의 틀을 갖추는 일이 하루아침에 완성되기는 어렵고 끈질긴 국민적 독려가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민초가 직접 나서서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속의 따뜻함을 잃지 않기 위해, 곧 인간됨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꽃 한 송이씩이라도 서로 선물하는 일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꽃 한 송이로 모든 욕구를 상징적으로만 충족해야 하는 단계는 벗어나 있다. 기업의 구조조정 못지않게 관공서의 낭비적 관행을 줄이고 일반 국민의 소비의식도 구조조정을 한다면 꽃보다 훨씬 더 실질적인 선물로 불우한 이웃의 마음과 몸을 함께 덥혀줄 수 있는 여지를 대다수의 국민은 가지고 있다.

불우한 이웃과 희망 나눠야

삶의 품격에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손상이 될 수 있는 거품을 지금 우리는 얼마나 많이 끼고 사는가 스스로를 돌아보자. 호화판 돌잔치를 벌이고 비싼 외국 상표가 붙은 소모품을 과시하는 대신 사랑의 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나 탈북 어린이 학자금 모금 운동에 돈을 조금 보내거나 반찬거리라도 장만하여 이웃의 노인 복지관을 찾아가 보자. 받는 이의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기 전에 먼저 풍요로워지는 것이 주는 이와 그 가족의 마음이다. 그리고 주고받는 양쪽뿐 아니라 그들을 품은 우리 사회 전체가 혹독한 경제의 겨울도 견뎌내고 다시 아름다운 불꽃으로 활활 타오를 수 있게 해주는 따뜻한 인간성과 희망의 불씨를 보강받게 된다.

이인호 KAIST 김보정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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