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경수로 실패’ 이대로 잊으면 안 된다

  • 입력 2008년 9월 10일 02시 56분


2006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경수로 사업이 종료되기 전부터 정부 관계자들은 종종 “정권이 바뀌면 경수로 청문회가 열릴 것 같다”는 말을 했다. 특히 경수로사업단의 고위 관계자들이 그런 걱정을 많이 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100만 kW짜리 한국형 원자력 발전소 2기를 지어주려 했던 경수로 사업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였다.

청문회도 고려해야

사업이 종료된 지 2년이 지난 지금 경수로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애물단지가 됐다. 북한의 함경도 신포 금호지구에 세워진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들은 나날이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 남한의 기술자와 건설인력이 철수한 뒤 북한은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다. 전체 공정(工程)의 35%가 진행되다 중단된 경수로 건설현장은 남북관계의 실패를 보여주는 을씨년스러운 상징의 의미밖에 없다.

그제 한나라당 김정훈 의원이 공개한 한국전력공사의 내부 보고서는 경수로 사업이 남긴 후유증 또한 심각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한전은 경수로 사업의 주계약자였다. ‘KEDO 사업 청산 및 기자재 처분대책’이란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경수로 사업의 청산비용을 부담하는 대가로 한전이 넘겨받은 8억3000만 달러(약 9030억 원) 상당의 경수로 기자재가 고철로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한전이 넘겨받은 원자로 설비와 터빈발전기는 구식(1996년 12월 수준)이어서 다른 나라에 팔수도 없고 국내에 들어설 차세대 원전에 사용할 수도 없다. 게다가 한전은 경수로 기자재 보관비용으로 지난해 114억 원을 지불했고 올해 들어서도 벌써 60억 원을 썼다고 한다. 한전 보고서는 2010년까지 아무 대책 없이 기자재를 보관할 경우 최대 500억 원을 보관비용으로 지출해야 할 것으로 예상했다.

노무현 정부의 경수로 청산 과정은 의문투성이였다. 2002년 10월 2차 북핵 위기가 불거진 뒤 미국은 대북(對北) 중유공급을 중단하고 경수로 사업을 끝내자고 했지만 한국은 끈질기게 사업 지속을 주장했다. 핵 포기를 중단한 북에 계속 핵포기 대가를 제공하자고 우긴 것이다. 노 정부는 미국의 종결(termination) 요구에 맞서 일시 중단(suspension)이라는 꼼수를 동원해 경수로를 2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유지하게 했다. 결과는 성공 가능성이 없는 사업을 지속하느라 국민 세금만 더 축낸 셈이 되고 말았다.

한전의 고민도 노무현 정부 때문에 깊어졌다. KEDO가 2006년 5월 31일 경수로 사업의 공식 종료를 결정하자 통일부는 다음 날 한 장의 보도자료를 냈다. 통일부는 “한전이 손해를 보지 않고 기자재를 활용하게 돼 정부나 국민이 추가로 부담하는 비용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전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지금 누군가는 그 거짓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경수로 생명 연장’을 주도한 책임자는 누구인가. 경수로 청문회를 통해서라도 밝혀내야 한다.

15억 달러 北주민위해 썼더라면

경수로 사업은 김대중 정부에서 시작돼 노무현 정부에서 끝났다. 두 정부가 대를 이어 북한 정권 비위 맞추기에 매달리는 사이 동쪽의 경수로 사업장에서는 15억6200만 달러가 공중으로 날아갔다. 한국이 허비한 돈만 11억3700만 달러에 이른다. 그 책임을 이대로 눈 감을 수는 없다.

신포 경수로 현장에서 근무한 남측 국민들은 가슴 아픈 경험을 했다. 처음에 만난 북한 노동자들은 대부분 깡마른 모습이다. 그들은 남측에서 제공하는 밥을 마음껏 먹고 며칠이 지나면 한결같이 부은 듯 살이 찐다. 식당 일을 하는 처자들도 처음엔 새까만 얼굴에 비쩍 마른 모습이지만 하루 세 끼를 제대로 먹게 되면 한 달이 못돼 신수가 훤한 미인으로 변한다. 경수로 사업비를 차라리 북한 주민 먹이는 데 썼더라면 아깝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단절된 남북대화는 역설적이지만 남북관계의 재정립을 요구하는 경고다. 잘못된 대북정책과 왜곡된 남북관계를 바로잡지 않으면 한반도 상황은 개선될 수 없다. 실패한 경수로가 남긴 교훈이기도 하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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