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광현]한전과 LG의 차이

  • 입력 2008년 9월 9일 02시 56분


몇 년 전 평소 알고 지내던 한 벤처기업 대표가 직접 겪은 일이라며 들려준 이야기다. 신제품을 개발해 한국전력에 납품하려는데 어렵게 만난 실무자는 여러 번 설명을 듣고 샘플을 시험한 뒤 품질도 좋고 가격도 싸다고 인정했다고 한다. 그럼 납품하게 되느냐고 묻자 그 실무자가 던진 한마디. “사장님이 새로 이 제품을 넣으면 지금 납품하고 있는 사람은 뭐 먹고 삽니까.” 벤처 대표는 이 말에 갑자기 머리가 멍해져 자료와 샘플을 가방에 싸서 나왔다고 한다.

대다수 직원은 안 그렇겠지만 아직도 한전이라면 그 일화부터 떠오른다.

지난달 27일 김쌍수 전 LG전자 부회장이 연 매출 65조 원이 넘는 거대 공기업 한국전력공사의 사장에 취임했다. 기대가 큰 만큼이나 혈혈단신으로 입성해 과연 방만한 경영과 만연한 비리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김 사장이 한전 사장 제의를 받았을 때 주변에서는 ‘한전이란 데가 어떤 곳인 줄 아느냐. 혼자 들어가서 말년에 무슨 창피를 당하려고 그러느냐’며 만류하는 소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LG전자에서 김 사장의 혁신활동과 눈부신 성과는 아직도 진행 중인 신화다. 전자업계에 가격파괴의 바람이 몰아치던 1994년 당시 LG전자 생활가전부문은 사정이 심각했다. 맥킨지로부터 ‘경쟁력도 없고 장래성도 없다’며 GE 같은 해외기업에 매각하는 게 좋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 사장이 “그렇다면 내가 해보겠다”며 매각에 반대하고 본격적인 혁신을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최고경영자(김 사장)는 극단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대대적인 조직파괴를 단행했다. 30명 정도의 부서장이 단지 3명으로 줄었다. 그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쯤 되니 조직 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돌았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죽기 살기로 한 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그레이트 피플: LG전자, 그들은 어떻게 세계를 제패했나’·곽숙철·웅진윙스)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김 사장이 제품이나 서비스, 프로세스를 완전히 찢어발겨서 근원적으로 바꾼다는 뜻의 TDR(Tear Down & Redesign)를 시작한 것도 이때다. 3년 만에 3배의 성과를 올린다는 믿기 힘든 목표도 달성했다. 그 결과 LG의 가전부문은 전 세계 시장을 누비며 오늘날 ‘위대한 기업(Great Company)’이 됐다.

이번에 한전은 민영화 대상에서 빠졌다. 그 대신 전력산업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경영 효율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 개혁이 추진된다고 한다. 다음 달에는 이에 대한 토론회도 열린다. 선진화 방안에는 근사한 내용이 많이 담길 것이다.

그러나 최고경영자에서 신입직원까지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부터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지 않는 한 독점 공기업의 어떤 화려한 목표와 그럴싸한 실천계획도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한전 직원들이 LG전자 직원보다 도덕성이나 자질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경쟁에 따른 위기의식이 있느냐 없느냐는 점이다.

김 사장의 한전 혁신, 나아가 이명박 정부의 공기업 개혁 성패 여부도 ‘변하지 않으면 죽겠구나’라는 위기의식이 들게끔 조직과 문화를 바꾸느냐, 바꾸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광현 경제부 차장 kk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