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오세훈 시장의 문화재 인식

  • 입력 2008년 9월 2일 20시 08분


문화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문화와 별 관계가 없는 정치인이면서도 타고난 문화 전도사이기 때문이다. 오 시장은 2006년 취임 이후 가는 곳마다 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다닌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선거구호로 내세워 크게 히트했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구호를 패러디해서 ‘바보야, 이젠 문화야’를 자주 입에 올린다.

시청 본관의 잘못된 철거

지도자의 의지는 문화 발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조선시대 세종과 정조 때에 우리 문화가 융성했던 것은 두 왕이 손꼽히는 ‘문화군주’였던 덕분이다. 프랑스 파리는 문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퐁피두와 미테랑 두 전직 대통령에 의해 문화도시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세계 10위권의 국가경제 규모에 비해 취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문화를 키우기 위해서는 문화적 열정을 지닌 지도자가 많을수록 좋다.

그토록 ‘문화시장’을 자처해온 오 시장이 중대한 판단 착오를 했다. 지은 지 80년이 넘은 서울시청 본관의 일부를 기습적으로 헐어버린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시청 본관 뒤편에 새로운 청사를 짓는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당연히 옛 건물은 보존하리라고 생각했다. 서울을 600년 역사도시라고들 하지만 오랜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건물들은 거의 철거되고 없다. 그나마 살아남은 서울의 대표적인 근대건축물을 어쩌다가 부술 생각을 했을까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 시장의 격한 결정에는 여러 사연이 있어 보인다. 그는 선거공약인 서울시 신청사 건립을 서두르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바로 옆에 사적(史蹟)인 덕수궁이 있어 문화재청 심의를 통과해야만 신청사를 지을 수 있었으나 문화재청이 이것저것 제동을 걸면서 당초 계획이 틀어졌고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그렇더라도 ‘먼저 부수고 보자’는 전혀 문화적이지 않은 해결방식은 자제했어야 했다.

오 시장에게 다시 실망한 건 사태가 벌어진 이후다. 문화재청이 오 시장에게 맞서 시청 본관을 사적으로 가지정하고 철거를 봉쇄하자 그는 문화재청을 정면 비판했다. 2002년에는 문화재청이 시청 본관에 대해 보존 가치가 떨어진다고 평가했다가 이제 와서 말을 바꿨다고 했다. 문화재청은 물론 부인하고 있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문화재를 보호하는 국가기관이 서울시청 본관을 허물어도 좋다고 했을 리 없다. 철거를 자꾸 합리화하려다 보니 다른 악수(惡手)가 나오는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오 시장도 건물 보존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하고 있고 문화재청도 완전한 원형 유지를 고집하는 건 아니다. 건물의 역사성을 유지하면서 서울시민의 공간으로서 활용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서울시가 해온 말만으로는 건물의 얼마만큼을 허물고 어디까지 보존하겠다는 것인지 모호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문화재청에 대한 불신으로 정확한 카드를 상대방에게 보여주기 싫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재청은 서울시가 건물 가운데 돔이 있는 곳만 남기고 모두 철거하려 한다고 보고 있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세부 계획을 앞에 놓고 빨리 협의에 나서야 한다.

문화행정 심화해 만회를

오 시장이 취임한 이후 서울시민은 문화를 접할 기회가 크게 늘었다. 올해 서울시는 서울의 문화 역량을 키워 경제 효과까지 창출하겠다는 ‘창의문화 도시’를 선언하기도 했다. 문화계 내부에서는 그의 문화 행정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나무보다는 숲을 보는 일이 필요하다. 대중이 문화를 자주 접해야 문화의 기반이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이번 일은 그로부터 한걸음 나아가 오 시장의 문화 행정이 한 단계 심화되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문화는 모두를 어울리게 하고 화해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갈등을 극복하고 과거와 현재를 조화시켜 준다. 오 시장이 이런 본질을 생각한다면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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