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형국]여한 없이 떠난 박경리

  • 입력 2008년 6월 28일 02시 58분


낫살이나 먹었음에도 나는 종종 몽상에 빠진다. 선인들의 발자취에 감복할 때마다, 꼭 그 시절을 살아서 만나야 했거나 멀리서나마 그 인품의 향기를 맡았으면 좋았겠다는 꿈이다. 충무공 같은 이가 내가 그렇게 꿈꾸는 인물이다.

훗날 이 세상을 살 사람들이 만나기를 꿈꿀 인명록에는 필시 작가 박경리도 들 것이다. 지난 일요일, 내세 인연의 점지를 축원하는 사십구재가 월정사에서 열렸던 것은 작가가 살아낸 삶의 자취, 그 진실의 자취를 문학으로 담아낸 집념이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 추앙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많은 소설 가운데서도 작가의 대표작은 단연 5부 구성 대하소설 ‘토지’다. 망국의 대한제국 말부터 일제에서 광복하던 시점까지 이 민족의 애환을 담은 소설은 우리 민족주의의 승화 과정을 그렸다. 국권을 잃은 처지에서 우리가 기댈 언덕이라곤 민족주의 말고는 달리 없었다. 민족주의는 언어 역사 문화 등 고유의 정신상 현창에 매달리는데, 정신적 콘텐츠로서 각양각색 ‘살아있는’ 인물의 명멸이 소설의 줄거리. 한마디로, 이야기로 읽는 민족수난사다.

집필에 들어가던 1960년대 말은 한창 압축근대화에 골몰하던 시절이었다. 반작용으로 한편에서 우리다운 정체성 정립을 위해 와신상담 중이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문학하려던 이들의 ‘토지’ 호응은 대단했다. 월간지 연재 전개가 궁금한 나머지, 굶주린 사람 쌀 배급 기다리듯, ‘인쇄 따끈한’ 잡지를 사보려고 책방 앞을 서성이던 정경이 신화처럼 오늘까지 전해온다.

광주학생항일운동 발발 때까지 3부로 끝낸다던 당초 구상에서 심기일전, 광복 시점까지 적겠다는 의욕을 앞세워 피붙이 근접(近接) 말고는 아무 인연이 없던 원주로 옮겨가 칩거한다. 내가 작가를 찾은 시점은 4부 집필 초입이었다.

거기서 엿본 작가의 일상은 몰입, 또 몰입이었다. 교자상 위에서 원고지와 씨름하는 작가의 몰입은 면벽 수도하는 선승과 다를 바 없었다. 세상에서 직간접으로 만난 인간상을 훤히 꿰뚫어보려고 작가는 마음의 거울을 닦고 또 닦았다. 매일처럼 텃밭에서 김매기로 ‘오체투지’도 하면서 닦아낸 마음의 거울에 비친 인간상, 특히 주인공들의 희로애락이 가감 없이 소설의 줄거리로 반사된다. 작가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만주 용정의 거리 묘사를 읽은 한 인사가 직접 현지를 가보고는 소설의 현장감에 놀랐다 한다. 그 정도로 진작 신기(神氣)가 올랐던 작가이고, 그런 마음의 거울이었다.

그 마음 거울에 자신의 처지도 직접 비춰보려고 지인들이 작가를 찾았다. 그 거울에 비춰만 봐도 동병상련의 위안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학총장과 교수, 예술인과 언론인, 명망 여류들이 줄을 잇는 원주의 작가 거처는 바로 그들의 생기 재충전소였다.

어디 명망 인사만이던가. 당신 또한 전후 서울 거리에서 리어카를 끌어본 이력도 더해져 밑바닥 삶에 대한 연민이 체질로 굳어 있었다. 영상으로 이미 만났든가 어시장바닥 아낙네가 알은체하면 서슴없이 얼싸안던 작가였다. 전·현직 대통령의 문상에다 장례행렬이 지나던 통영 시가지는 거의 철시였으니 국상(國喪)이 따로 없었다. 토지 완간은 고도성장의 자랑인 중화학공장 여럿 건립과 맞먹는 위업이라는 동업자의 찬사나, 문학상 수상자에 작가 이름이 오르지 않음을 두고 “노벨상이 시시함을 이제 알겠다”던 식자의 말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었다.

토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월선의 죽음 장면. 바로 당신을 위해 예비해 둔 구절이었다. “니 여한이 없제?” 정인(情人) 용의 채근에 “야, 없습니다”고 마지막 말을 뱉는다. 용은 그의 문학을 사랑했던 이 시대 한국 사람이고, 여한 없기는 월선이 바로 박경리였던 것.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