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워치포럼]“생이별 가족 상봉이 새터민 만병통치약”

  • 입력 2008년 6월 14일 03시 00분


경기 안성시 하나원 본원에 근무하는 하나병원 의료진. 왼쪽부터 공중보건의 오준호 전진용 윤재영 정해원 씨와 간호사 전정희 씨. 안성=변영욱 기자
경기 안성시 하나원 본원에 근무하는 하나병원 의료진. 왼쪽부터 공중보건의 오준호 전진용 윤재영 정해원 씨와 간호사 전정희 씨. 안성=변영욱 기자
《통일부의 북한이탈주민 정착 지원 사무소인 하나원(원장 고경빈)에는 하나병원이 있다. 자유를 찾아온 새터민들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보살피는 ‘통일 전선의 야전병원’인 셈이다. 이곳에서는 군 복무 대신 사회에 공헌하는 공중보건의들이 진료를 한다. 2년차로 접어든 선배 의사 두 명에 4월 후배 네 명이 합류했다. 2004년 병원 설립 이후 처음으로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신경정신과 전문의도 포함됐다. 신참 네 명이 첫 출근을 한 4월 28일을 비롯해 5월 28일과 6월 4일 등 세 차례 병원을 방문해 의사 6명의 눈에 비친 북한과 북한 사람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원 부설 하나병원 의사들이 본 환자들

월요일마다 하나병원을 찾는 환자가 있었다.

2년차 한의과 의사 오준호(29) 씨가 ‘월요병’의 이유를 물었지만 환자는 두 달이나 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의사: 주말에 뭘 하시나요?

환자: 그림을 그려요.

의사: 무슨 그림이죠?

환자: 꽃 그림.

▽몸의 병보다 심한 마음의 병=환자의 사연은 이랬다. 북한을 떠나기 전 한 수용소에 감금됐다. 수용소에 전염병이 돌았고 그도 병에 걸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시신들과 구덩이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있는 힘을 다해 시신을 헤치고 구덩이 밖으로 나왔다. 황량한 황무지 위에 꽃 한 송이가 눈에 보였다. 그 순간 살았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용솟음쳤다. 그렇게 용기를 얻은 그는 지난해 북한을 떠나 자유의 품에 안겼다.

하나원에서 그는 휴일의 남는 시간에 꽃을 그렸다. 구덩이 속에 죽어 널브러진 동료들이 생각났다. 죽은 자들이 가여웠고 살아남은 것이 미안했다. 잠이 오지 않았고 머리가 아팠다.

오 씨는 “심한 정신적 충격에 따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 증세”라며 “많은 새터민이 몸의 병보다 마음의 병 때문에 고생한다”고 말했다.

신경정신과 1년차 의사 전진용(32) 씨는 “현지에서의 생활과 탈북 과정도 힘들지만 탈북 후 중국 등지에서 체포될 수 있다는 두려움도 병의 원인”이라며 “여성들은 체제의 억압보다 보수적인 남편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당한 경험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새터민들은 환경 변화에 따라 심경의 기복이 심하다고 의사들은 입을 모았다. 한국 가정을 경험하는 ‘홈 스테이’ 이후에 갖은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이 생각나서다.

▽같으면서 다른 언어=신참 의사들과 환자들은 첫 만남에서 소통의 장벽을 실감한다. 의사들은 “수업 듣다가 너무 바빠서(아파서) 왔다”거나 “머리는 일없고(괜찮고) 가슴이…”라는 말에 당황한다. 어떤 환자는 의사의 ‘한국어’ 설명을 절반만 이해한다.

내과 1년차 의사 윤재영(30) 씨는 “보통의 새터민들은 수줍고 자신이 없어 다시 물어보기를 꺼리기 때문에 쉽게 천천히 말해주고 잘 이해했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체제의 차이가 만든 근본적인 소통의 어려움도 있다. 새터민들은 정신과 의사를 두려워한다. 북한의 정신병원인 ‘49호 병원’은 수용소의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

새터민들은 가슴이 아프면 ‘심장병’, 왼쪽 아랫배가 아프면 ‘췌장염’ 등 아픈 부위로 병의 원인을 단정하는 경향이 있다. 의사들은 “북한 의사들의 잘못된 진단 기법 때문”이라며 “어떤 환자는 아픈 장기를 꼭 찍어주지 않으면 화를 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부족의 경제가 낳은 습관=새터민들의 버릇과 건강상태에는 사회주의 체제와 경제난이 그대로 각인돼 있다.

보통의 새터민 환자들은 실제 아픈 것보다 더 아프다고 말한다. 일을 안 해도 배급을 받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 쉬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 또 한 번에 많은 약을 받으려고 한다. 1990년대 이후 경제난 속에서 가능할 때 물자를 많이 확보하려는 ‘축장(蓄藏)’의 습성이 몸에 붙어서다.

거친 음식을 먹은 탓에 치아와 위장이 손상된 사람이 많다. 치과 1년차 의사 정해원(24) 씨는 “100명 중 97, 98명은 치과 질환자”라고 증언했다.

약물 오남용과 자가 치료의 폐해도 크다. 1년차 내과 의사 양홍석(30) 씨는 “약을 많이 먹으면 병이 빨리 낫는다는 오해 때문에 1주일 치 약을 하루저녁에 먹어버린 경우도 봤다”고 말했다. 피부 여기저기 뜸 자국이 많은 것은 돈이 없어 뜸으로 건강을 달랬다는 증거다.

▽불신과 대결에서 이해와 신뢰로=이런 문제들은 신참 의사와 신입 환자 사이에 불신과 대결을 낳는다. 의사는 환자가 솔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환자는 의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만이다. 양 씨는 “북한에서 척추 결핵 판정을 받아 허리 통증을 호소하던 환자가 주말에 동료들과 축구를 즐겼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 났다”고 털어놓았다.

한의과 2년차 의사 김철한(32) 씨도 신참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새터민들이 왜 그러는지 이해하게 됐다.

“한 환자가 매일 병원에 와 침을 맞고 누워있기를 좋아했어요. 처음엔 꾀병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적인 관심을 느끼자 그가 병원에 오길 기다리게 됐습니다.”

김 씨는 “이 경험 이후 ‘내가 그동안 사람은 보지 않고 병만 보려고 했구나’라고 깨우치게 됐다”고 털어놨다. 의학도의 길에서 뜻하지 않게 북한과 북한 사람, 한반도의 문제에 눈을 뜨게 된 하나병원 의사들은 모든 새터민 환자의 만병통치약이 뭔지도 알게 됐다.

“북한에 두고 온 아들만 생각하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고 찾아온 한 중년 여성이 있었어요. 그녀는 늘 내게 말했죠. ‘아들만 다시 볼 수 있다면 이놈의 두통도 씻은 듯이 나을 거예요’라고….”(한의과 의사 오준호 씨)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공동기획: 동아일보,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 북한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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