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조진수/'묻지마 영어투자' 나라 망친다

  • 입력 2001년 4월 9일 18시 43분


영어 열풍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필자가 중학생이던 30여년 전에도 영어 학원과 과외가 모든 학생과 학부형을 괴롭혔고 취직이나 유학시험을 위한 AFKN반, 타임반, 뉴스위크반 등을 내세운 학원들이 즐비했었다.

이제는 전국의 골목마다 영어학원 차량들이 학생들을 실어 나르고,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유아를 위한 영어 놀이방까지 등장했다. 영어 조기교육 열풍은 사교육비 부담을 엄청나게 가중시키고 영어가 모국어인 수많은 외국인들이 자격검증도 받지 않고 돈벌이를 위해 한국에 몰려들고 있다.

대학에서는 우리말로 가르쳐도 이해하기 어려운 공학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면 교수의 강의 점수를 더 쳐주는 진풍경까지 연출되고 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직장인들이 진급을 위해 TOEIC이나 TOEFL을 공부하고 영어실력 부족으로 진급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애환은 차라리 비극이다.

도대체 우리 나라의 경쟁력에 영어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온 국민이 영어 열병에 시달려야 하는가? 모든 국민이 영어를 잘해야 된다는 논리는 어디서 생겼을까? 정부가 앞장서서 영어 교육에 쏟아붇는 엄청난 국민적 투자가 경제에 얼마나 보탬이 돼서 우리를 잘살게 해주고 있는가? 이쯤 되면 영어가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가져볼 만하다.

나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직장생활까지 한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는 영어를 잘하는 축에 끼지만, 1년에 한번 정도 외국 학회에 가서 논문을 발표할 때 말고는 영어를 할 일이 별로 없다. 사실 발음을 제대로 못해도 참가자들이 논문 사본을 다 보고 있으니 논문 내용을 전달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영어를 잘하기 위해 따로 돈을 내고 배웠으면 배가 아플 뻔했다.

세계에서 잘사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국가적, 문화적 주체성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물론 유럽 사람들은 영어를 잘하지만 이는 그들 국가들간의 지리적, 역사적 관계에서 기인한다. 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왜 일제가 우리에게 일본어를 강요했을까? 언어가 그 국민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오랜 식민지 생활 덕분에 외국어를 잘하는 국민의 비율이 우리보다 무척 높다. 그러나 주체성이 약화된 그들은 독립 후 대부분 경제 건설에 실패했다. 필리핀이나 인도 사람들처럼 그나마 배운 영어 덕분에 외국에 나가 춤과 노래를 팔고 품을 팔아 달러를 버는 것이 우리의 목표일까?

물론 인적자원이 가장 큰 무기인 우리는 세계 모든 국가와 치열한 경제 전쟁을 치러야 한다. 당연히 외국어는 필요하다. 하지만 영어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러시아, 중국, 아랍 등 다른 언어권 국가의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학교에서의 외국어 교육은 당연히 다양해져야 한다.

영어로 말할 일이 거의 없는 국민에게까지 영어에 대한 투자를 강요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비논리적이다. 이제는 정부가 대다수 국민에게 큰 정신적 압박을 주고 있는 맹목적 영어 열풍을 진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조진수(한양대 교수·항공기계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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