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칼럼]100일도 안됐는데

  • 입력 2008년 5월 26일 03시 00분


지난 대선에서 참패한 민주당은 충격으로 공황 상태에 빠졌다. 많은 중진이 총선 출마를 포기했고 아예 정계에서 은퇴한 이도 있다. 4월 총선에서도 중진들이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그런데 그 후 40여 일 만에 다시 기력을 회복했다. 여당을 누르는 지지율을 1년 안에 탈환하겠다고 호언하는 인사도 있다. 가두투쟁으로 이력을 쌓은 정치집단답게 야당 역할에서 본령과 활로를 되찾고 자못 고무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압승에 의기충천했던 여당 쪽의 사정은 밝지 않다. 취임 후 백일도 안 돼서 대통령 지지율 20%대라는 결과에 곤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며 대통령이 연방 고개를 숙였지만 대중 집회의 열기는 수그러질 기색이 없다. 킥오프에서 실점까지 10여 초밖에 걸리지 않았던 2002년 월드컵 당시 터키와의 대전 장면이 떠오른다. 지지표를 던졌던 많은 유권자가 그 장면을 다시 본 듯 황당해하고 있다. 도대체 어찌 된 셈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압승한 것은 무엇보다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정 때문이다. 집권당의 오만과 독선, 무책임한 방언과 이념 편향에 국민이 넌더리를 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직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모셔야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측근들은 그러지 않았다. 되레 전직 대통령을 스승 삼기로 작심한 것 같다. 승리에 도취해 오만과 독선에 빠졌고 알맹이 없는 말이 많았다. 노 전 대통령 못지않게 이 대통령의 승리에 기여한 인사는 단연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이다. 경선 결과에 승복해서 표를 모아주었기 때문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눌렀으면…

경선 승복은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정치는 당연한 일을 이행할 만큼 순리로 운영되지 않았다. 국민은 언제나 야당에 표를 몰아주었지만 분열로 말미암아 패배했다. 1963년이나 1987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경선 불복으로 여당이 패한 1997년의 사례는 기억에 생생하다. 이 대통령은 경선에서 승리했지만 1.5%포인트 차의 신승이었고 그나마 선거인단에서는 패배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눌렀으면 의당 박힌 돌을 끌어안아야 한다. 그것이 순리요 정치 도의다.

그러나 대통령 측근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을 자처하며 목에 힘을 주었다. 4월 총선 공천심사 결과는 오만과 독선의 생생한 증거다. 한두 사람 나가도 당은 끄떡없다고 호언했다. 나갈 사람 나가라는 소리나 진배없다. 평화적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의 점진적 실현을 희구했던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는 “혁명이 성공한 즉시 직업적 혁명가는 모두 처형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독설가의 방언에 지나지 않지만 정치적 통찰이 담겨 있다. 공신들의 오만이나 잇속 챙기기가 정권의 부패나 몰락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에겐 한쪽으로 쏠리기 잘한다는 안타까운 취약점이 있다. 한편 오만과 방자는 못 봐준다는 막강한 미덕도 있다. 그 미덕이 기막히게 발휘돼 총선에서 몇몇 실세가 우수수했다. 현행 선거법상 무소속은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또 무소속 당선은 희귀 현상이 되어 가던 참이다. 그런데 무소속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그럼에도 대통령과 측근들은 거기 반영된 민심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형식논리로 자승자박하고 턱걸이 과반수 획득에 희희낙락했다. 특정 계보를 두둔하는 소리가 아니다. 민심을 읽으라는 것이다. 당내 비주류도 건사하지 못하는 좁쌀정치로 어떻게 노련한 야당과 대화하고 국민 각계각층과 소통하겠다는 것인가? 그게 될 성싶은가?

당내 소통하고 민심 받들어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공허한 소동, 번복과 사퇴로 얼룩진 인물 등용, 협상력 열세가 처음부터 자명했던 쇠고기 협상에서 드러난 아마추어리즘 등을 우리는 모두 집권 초 시행착오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싶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민심의 향배에 무심했던 오만과 독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찌감치 찾아온 시련이 자기성찰과 새로운 도약으로 이어지길 국민은 간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압승했다고는 하나 정녕 아슬아슬하게 이루어낸 정권 교체였기 때문이다.

지지율 하락에 고무되어 전투적 야당의 파상 공세나 북의 선전 공세는 더욱 격화될 것이다. 새 정부는 진정한 겸허, 현명한 결정, 과감한 실천을 보여줘 위신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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