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서정보]돌 던지는 법

  • 입력 2008년 5월 6일 03시 00분


일본 프로기사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 9단은 ‘반상의 미학자’였다. 아름다움과 능률을 중시하는 그는 바둑이 집을 차지하고 승부를 가리는 행위를 뛰어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돌의 형태미와 행마의 간결함이 돋보이는 그는 ‘바둑의 미학’을 실전에서 보여준 기사로 꼽힌다.

그는 바둑판 위에서 미학을 구현한 것만큼 돌을 던지는 미학에서도 일류의 풍모를 보였다.

종반 무렵 한두 집 정도 차이가 나고 더 두면 추한 행마가 불가피하다고 여겨질 때 그는 이렇게 말하며 돌을 던졌다.

“없군요.”

혹은 옆에 있는 기록원에게 말했다.

“카메라맨을 불러주시죠.”

중요한 대국이 끝나면 언론사의 사진기자가 대국장에 들어와 복기 장면을 찍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국내에선 김인 9단이 대표적 기사였다. 담백하고 소탈한 성품의 그는 승부사이면서도 승부를 즐겼다. 그는 80여 수 만에 돌을 던진 적이 있을 정도로 승부에 초탈했다.

그런데 멋지게 돌을 던지는 풍조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바둑의 예도(藝道)적 측면보다 승부의 측면이 강조되는 시대가 된 탓이다. 조훈현 이창호 시대처럼 1인 독주시대가 끝나고 유망한 젊은 기사가 속속 등장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이런 경향은 짙어지고 있다.

여기에 제한시간과 덤 제도의 변화가 한몫했다. 제한시간은 5, 6시간에서 3시간 미만으로 확 줄었다. 또 덤도 4집 반, 5집 반에서 6집 반으로 늘었다.

덤 증가는 흑에 더 많은 부담을 지웠고 흑은 먼저 두는 이점을 살려 초반부터 변화를 주도하며 난전으로 유도해야 했다.

제한시간이 짧아지자 깊은 수읽기가 어려워졌고 정확한 계산으로 유장하고 확실한 길을 가기가 힘들어졌다. 초읽기에 몰리면 감각과 배짱으로 둘 수밖에 없다. ‘모 아니면 도’의 승부 걸기가 많아지고 좋은 모양보단 실용적인 수가 더 선호된다.

그래서 모양새가 좀 좋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데까진 다 해보게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돌을 쉽게 던지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도 돌을 던지는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는 공감대는 남아 있다. 해볼 데마저 없어졌는데 질질 끄는 것은 예의를 따지기 이전에 바둑 팬들이 싫어한다.

‘졌다’고 인정할 순간을 포착하는 것도 실력이다.

프로기사라면 뻔히 결과를 예견할 수 있는 단계에서 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더 버티다 추하다 못해 프로기사로서의 안목을 의심하게 되는 상황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경쟁도 치열해지고 인심마저 부박해지고 있다.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현상이 심해지며 내 것을 챙겨야 한다는 집착 또한 늘었다. 지나친 집착으로 버려야 할 시점을 놓치고 질질 끄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물론 돌을 흔쾌히 던지기 어렵게 상황을 만드는 면도 있지만 흔쾌히 던지는 것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다.

그러나 바둑도 한 판의 대국으로 끝이 아니고 세상도 하나의 사건으로 끝이 아니다.

한 판의 바둑으로 더는 상대하기 싫은 인물로 찍힐 수는 없는 것 아닐까. 앞으로 바둑을 둘, 세상에 도전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아쉽다고 해서 타이밍을 잃는 우를 범하면 미래마저 놓칠 수 있다.

서정보 문화부 차장 suhcho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