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육정수]성(性)차별 표현

  • 입력 2008년 5월 3일 03시 00분


1947년에 제작된 ‘신사협정’(gentleman's agreement)이란 영화가 있다. 한 작가가 당시 미국사회의 반(反)유대인 정서에 대해 잡지사의 원고청탁을 받는다. 유대인이 아닌 그는 고민 끝에 직접 유대인 행세를 해본다. 그러자 미처 겪어보지 못한 온갖 차별이 그를 따라다닌다. 아들은 학교에서 ‘더러운 유대인’이란 소리를 듣고, 그 자신은 사랑하는 여인과 호텔에 들어가려다 유대인이란 이유로 투숙을 거부당한다. 결국 주인공의 글은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는다.

▷이 영화에서 신사협정은 당시 당연시돼 있던 반유대인 정서를 뜻한다. 신사협정이라 하면 신의를 지키는 측면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공개하기 부끄러운 밀약(密約)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때 그 표현은 남성들에게 오히려 불명예가 된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국립국어원이 ‘숙녀협정’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를 남성 우월적 표현으로 지목하고 ‘명예협정’이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이런 식으로 항간에 자주 쓰이는 표현 5087개를 문제 삼았다.

▷일리 있는 지적도 많다. 그러나 상당수는 너무 작위적(作爲的)이라는 인상을 준다. ‘앳된’ ‘앙칼진’ ‘야들야들한’ ‘가녀린’ 등이 왜 성(性)차별적 표현인지 근거가 약하다. ‘1남 2녀’ ‘장인 장모’ 등은 남녀 우열보다는 병렬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앞뒤를 바꿔 써도 무방할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이 ‘아빠 엄마’보다 ‘엄마 아빠’로 부르는 것도 참고할 만하다. ‘부모’를 ‘모부’로 바꾸자는 말은 왜 없을까. ‘동거녀’ ‘내연녀’는 ‘동거남’ ‘내연남’과 함께 쓰는 말인데도 성차별의 탈을 씌웠다. ‘집사람’이 문제라면 ‘바깥사람’도 문제여야 한다.

▷말은 생성된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역사적 문화적 소산이다. 오늘의 관념, 잣대로만 재단해서는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표현의 빈곤을 낳을 수도 있다. 언론의 잘못된 표현을 연구하는 것은 좋으나 성 대결로 몰아가는 듯한 인상을 줘서는 곤란하다. 영어에서 빌려온 ‘처녀작’ ‘처녀비행’까지 문제 삼는다면 외국어도 우리가 고쳐줘야 할 판이다. 국립국어원의 제안대로 했다가는 아름답고 감칠맛 나는 표현을 상당수 잃어버릴 것 같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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