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자전거에서 배우는 인생

  • 입력 2008년 4월 1일 02시 53분


토요일마다 자전거를 50km쯤 탄다. 5년 됐는데 다른 일 때문에 못 탈 때는 몹시 허전하다. 습관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이 시간만큼은 회사와 집을 떠나 ‘나를 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필자 같은 중년 남자가 어디 그런 시간을 갖기 쉬운가.

자전거를 타다 보면 ‘인생의 길’ 같은 게 다가온다. 우선 자전거와 오래 지내다 보니 하나가 된다는 느낌을 얻는다. 10만 원도 안 주고 샀으니 성능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턴가 달릴 때 손을 놓을 만큼 한몸이 된다. 바퀴 밑에서 녀석의 호흡이나 웃음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페라리 등 명차들이 운전자와 한몸이 된다고 하지만 내겐 자전거가 그렇다.

자전거는 두 바퀴로 달린다. 앞바퀴가 가는 꼭 그만큼 뒷바퀴도 간다. 둘 중 하나가 넘치거나 모자라면 갈 수 없다. 이보다 더한 조화도 찾기 어렵다. 게다가 자전거는 달려야 쓰러지지 않는다. 천천히 가든 빨리 가든 두 바퀴가 함께 달리지 않으면 넘어진다. 혼자 살 수 없는 우리 인생 같다.

집이 있는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탄천을 따라 서울 잠실로 가는 길은 맞바람이 거세다. 겨울 칼바람은 매섭기 그지없다. 가만히 있으면 덜하지만 페달을 밟을수록 맞바람도 거세진다. 이때는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게 좋은 방법이다. 1∼2m 뒤에서 가면 신기할 만큼 바람을 피할 수 있다. 얼마간 따라가다가 미안하다는 생각에 다시 앞으로 나가는 것으로 빚을 갚는다. 때로는 앞에서, 때로는 뒤에서 간다. 인생이 그렇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질 때도 있다. 먼 곳은 더 아득해 보이고 다리 근육 곳곳에서 통증이 전해진다. 이럴 때는 고개를 숙여 자전거 앞바퀴 밑을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자전거 포장도로에 있는 작은 알갱이들이 서로 연결돼 실선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환각 상태 같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상당한 거리를 지나왔다. 삶이 고달플 때는 아득한 미래보다 현재를 충실하게 보내는 게 낫다는 도움말을 주는 것 같다. 때로는 꿈같은 미래보다 손에 잡히는 현재가 나을 때도 있다.

가끔 경쟁의 효과도 체감할 수 있다. 빨리 달릴지라도 그 속도에 안주할 때가 있다. 속도가 나는데도 안장 위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습관적으로 페달을 밟는다. 이때 누군가가 앞으로 치고 나가면 경쟁심이 발동한다. 따라잡겠다고 페달을 힘차게 밟기 시작하면 마음이 요동치고 바깥 풍경이 휙휙 지나간다. 이렇게 하면 3∼4km는 금세 달린다. 경쟁의 역효과를 우려하는 이들도 있지만 안주하는 삶에는 경쟁이 필요한 법이다.

자전거에 오르면 첫 10분이 가장 힘들다. 일주일 동안 풀렸던 근육이 뭉치기 때문에 고통도 있고 호흡도 가빠진다. 5년 동안 한 번도 첫 10분의 고통을 안 느낀 적이 없다. 그렇지만 이 고비를 넘기면 부드러운 순항 속도가 나온다. 무엇이든지 처음이 어렵다.

한 번은 늘 가던 길을 벗어나 다른 코스를 택했다. 커브나 고개가 나타날 때마다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동력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비슷한 풍경이 펼쳐지고 비슷한 사람들이 오갈 뿐이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게 아닐지….

허 엽 문화부장 he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