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연욱]‘성난 사람들’

  • 입력 2008년 3월 26일 02시 50분


날씨는 찌는 듯 더웠다. 12명의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은 배심원실에 격리되어 있었다. 아버지를 살해한 18세 소년의 일급 살인죄 적용을 둘러싸고 논의를 벌였다.

11명의 배심원은 쉽게 소년의 유죄를 확신했다. 단 1명의 배심원만 동의하지 않았다.

유죄를 주장하는 배심원 대부분은 빨리 이 논의를 끝내고 싶어 했다. 재판보다 당장 ‘먹고사는’ 개인적인 일이 급했기 때문이다.

처음 1인의 반대자가 품은 의심이 상황을 뒤집는 도화선이 됐다. 차츰 그의 논리적 설득으로 각종 편견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차례의 투표 끝에 결론이 바뀌었다. 배심원들은 살인 혐의의 소년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헨리 폰다가 열연한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원제 ‘12 Angry men’)은 영미식 배심제의 생생한 실상을 그려낸 수작이었다.

올해부터 국내에서도 배심제를 원용한 국민참여재판 제도가 돛을 올렸다. 지난달 처음으로 대구에서 국민참여재판이 열린 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시행 과정 곳곳에서 아쉬운 대목이 드러났다.

당장 서울에서 처음 열릴 예정이었던 국민참여재판은 무산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7부는 21일 강간 등 상해 혐의로 구속 기소된 장모(32) 씨 사건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을 열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법원이 장 씨의 국민참여재판 신청을 받아들이자 피해자는 “많은 배심원 앞에서 증언하기가 괴롭다”며 법정 출석을 거부했다. 결국 법원은 국민참여재판 대신 다음 달 2일에 일반 공판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법조계 주변에선 성폭행 피해자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고려한다면 법원이 피고인의 신청을 받아들이기 전에 피해자의 출석 여부를 사전 점검하는 세심한 배려가 아쉬웠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배심원들을 의식해 ‘감성재판’으로 흐를 가능성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지난달 12일 대구지법 재판 때 증인으로 출석한 피고인의 여동생이 아기를 안고 나와 배심원들의 동정심을 자극해 강도상해 피고인에게 집행유예라는 관대한 양형이 나왔다는 주장도 나올 정도였다.

한 법조인은 “검찰이 자극적인 증거 자료를 부각하거나 변호인이 동정심을 자극하는 행위는 결국 법리 이외에 다른 것을 노리는 것 아니겠느냐”며 “판사가 적절히 주의를 주면서 감성재판으로 쏠리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검찰이 지난달 대구지법에 이어 청주지법에서 열린 국민참여재판 결과에 잇달아 항소한 것도 짚어야 할 대목이다.

1심에서 공들인 국민참여재판의 결과가 일반재판인 항소심에서 반영되지 않으면 일반 국민을 재판에 참여시켜 민주적 사법제도를 뿌리내리려는 근본 취지에 배치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특히 법조인들은 검찰과 변호인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배심원들을 상대로 사건의 개요와 쟁점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기술을 더 다듬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국민참여재판은 그동안 시행 과정을 면밀히 평가해 고칠 게 있으면 보완해야 할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성난 사람들’을 보고 싶다.

정연욱 사회부 차장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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