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명분이 실종된 정치

  • 입력 2008년 3월 24일 03시 00분


2005년 이른바 ‘이인제법’(개정 공직선거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1997년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 대선 경선에 참여했다 패하자 당을 뛰쳐나가 독자 출마한 이인제 씨 같은 악례(惡例)를 막기 위해 공직선거의 정당 경선 불복자는 해당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한 법이다.

만약 이 법이 없었더라면 지난 대선이 어떻게 됐을까. 지금 통합민주당 대표를 맡고 있는 손학규 씨가 과연 한나라당 경선 전(前)에 탈당했을까. 자유선진당 총재인 이회창 씨가 한나라당 경선 후(後) 탈당해 대선에 독자 출마했을까. 두 사람은 이명박, 박근혜 후보와 함께 경선에 참여했을지도 모르고, 그랬더라면 짝짓기가 벌어지든 모두 완주하든 경선 판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경선 후 탈당해 각기 대선에 출마했을 수도 있고, 그랬더라면 대선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인제법이 존재함으로써 역사는 지금처럼 만들어졌다.

법 하나가 역사의 물길을 새로 냈지만 손 씨와 이 씨는 어느 누구도 이 법 때문에 탈당했다고는 하지 않았다. 손 씨는 “나는 한나라당을 바꾸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실행코자 노력했지만 당이 끝내 변화를 거부했다”고 했고, 이 씨는 “이번에 좌파정권을 바꿔야 하는데 지금의 한나라당 후보로는 불안하다”고 했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말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럴듯한 명분(名分)을 내세웠다. 정치인으로서 탈당은 쉽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더구나 정치는 명분으로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탈당 러시를 이루고 있는 정치인들은 어떤가.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할 것 없이 총선 공천에서 탈락한 의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당을 뛰쳐나와 독자 출마를 채비하고 있다. 그들이 쏟아놓는 변(辯)은 “억울해서 못 견디겠다”거나 “공천이 잘못됐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 등이다. 사실 달리 둘러댈 말도 없을 것이다. 이쯤 되면 명분이 아니라 오기이다.

억울하다고 느끼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기가 탈당을 합리화해주지는 못한다. 정치는 공익(公益)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익(私益)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말이나 행동은 납득할 만한 명분을 가질 때 국민의 공감을 사고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중앙당에 의한 이번 공천에 다소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바다. 문제점은 고쳐 나가야 한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면 공천을 신청한 행위 자체는 결과가 어떠하든 그에 승복하겠다는 의사 표현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공천이 출제자의 의도와 채점 방식에 따라 점수가 달라질 수 있는 주관식 시험 같은 것이어서 경선에 비해 객관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시험은 시험이다. ‘나는 반드시 붙어야 한다’는 생각은 독선이다. 그런 점에서 공천이나 경선이나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법이 다를 뿐 실질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셈이다.

그런데도 경선 패배자에게는 법으로 불이익을 주고 공천 탈락자에 대해선 탈당해 무소속이나 다른 정당의 껍질을 두르고 출마하더라도 아무 제한을 가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다. 정당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교정이 필요하다. 선거 때마다 탈당과 정당을 만들고 허물기를 손바닥 뒤집듯 쉽게 하는 명분 없는 정치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가.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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