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재승]주입식 EBS 수능방송

  • 입력 2008년 3월 12일 02시 59분


교육방송(EBS)에서 방영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위한 강의는 정말 끔찍하다. 학생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칠판 앞에 선 선생님들은 세상의 모든 사고력 문제를 암기 문제로 바꾸어 놓는 놀라운 재주를 선보인다. 평소 훌륭한 선생님들도 단위시간당 가장 저렴하게 제작되는 EBS 수능 강의에만 나오면 쉴 새 없이 혼자 소설의 발췌문을 분석하고, 수학 공식을 대입하고, 과학 지식을 쏟아내느라 바쁘다. EBS 수능 강의가 끔찍한 이유는 학원식의 일방적 주입식 교육을 공영방송이 공식화하고 그것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데 있다.

수능을 위한 수학 강의에선 주어진 문제에 이차함수 공식을 어떻게 대입해야 하는지만 알려 줄 뿐, 왜 350년 전부터 사람들은 이차함수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는지, 이걸 풀어서 우리는 어디에 쓸 수 있는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 생물 강의에선 신경세포가 수상돌기와 축색돌기, 세포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축색돌기는 활동전위를 만들어내 시냅스를 통해 다른 신경세포로 전달한다고 칠판에 적는다. 하지만 그런 구조가 대뇌 정보처리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활동전위가 대뇌 활동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국가 교육방송이 학원식 교육

“우리는 10년 이상 학교 교실 안에 갇혀 어려운 단어들만 배우다가 세상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학교 문을 나서게 된다”는 미국의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의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내가 진정 이런 교육을 받으며 자랐단 말인가.

EBS 수능 방송은 칠판 강의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식으로 학생들에게 깊이 있는 사고를 유도해야 한다. 학교 수업이 감당할 수 없는 현장 취재, 어려운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컴퓨터 그래픽, 실제로 해 보는 과학실험, 각 분야의 전문가 인터뷰, 교과서에 실린 지식들이 밝혀지게 된 역사 등을 강의해야 한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를 방문하고, 진자의 운동을 실제로 측정하고, 물이 기화할 때 물 표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보여 줘야 한다는 얘기다. 개별 학교나 교사 개인이 할 수 없는 교육 교재를 만들어 제공한다면 학생들에게 얼마나 유익하겠는가.

권위 있는 선생님이 출제 예상 문제를 짚어주고 수능과의 연계율이 높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칠판 강의가 정당화될 순 없다. 사교육 시장과 싸우기 위해 교육방송이 사교육화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전략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외주 제작되고 있는 현재의 수능 칠판 강의가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원 확보’가 중요하다. 국민이 내는 시청료 중에서 EBS가 차지하는 몫을 현재 3%에서 10%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 교육방송용 교재도 문제풀이식 교재가 아닌 두툼한 교양서 꼴이 돼야 하고, 판매수익의 대부분도 좋은 방송을 만드는 데 다시 사용돼야 한다.

EBS는 좋은 수능 방송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최근 EBS는 일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신설해 유익하고 수준 높은 내용을 매일 방송하고 있다. 수능 방송도 이렇게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이 EBS를 위해서도 유익하다. ‘EBS’ 하면 제일 먼저 ‘대학입시를 위해 억지로 봐야 했던 칠판강의’가 트라우마처럼 떠오른다면, EBS로선 소중한 시청자층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같다. 사실 이 문제는 교육방송만의 잘못은 아니다. 교육행정을 담당하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의지가 있어야 하고, EBS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방송계 내부의 지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재원 확충해 수준 높게 제작을

이제 곧 창설 5년을 맞게 될 EBS 수능 방송도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과 지원이 집중되어야 한다. 그것이 어린이들에게 사랑받고 엄마들에게 신뢰받는 EBS가 중·고등학생들에게서도 ‘사랑과 신뢰’를 얻는 길이다.

교육방송은 학원 수강이나 인터넷 유료 강의를 들을 형편이 안 되는 학생들에게 ‘대체재’를 공급하려고 하지 말고, 그들이 학원에 매몰된 학생들보다 더 깊은 사고력을 가질 수 있도록 ‘대안재’를 만들어 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정재승 객원 논설위원·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

jsjeong@kaist.ac.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