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승호]곶자왈 地主가 자기 땅 훼손한 사연

  • 입력 2008년 3월 11일 02시 54분


작년 2월 제주시 조천읍의 ‘곶자왈’을 무단 훼손한 사람들이 검거됐다. 용암석 위 부토(腐土)층에 형성된 숲을 가리키는 곶자왈은 나무와 넝쿨이 울창해 대낮에도 컴컴하다. 한반도 유일의 난대(暖帶)식생 지대로 항상 안개가 자욱하고 돌이끼도 두껍다. ‘제주의 허파’로 불리며 제주 삼다수의 생성지이기도 하다. 조경업을 하는 이들은 여기서 산딸나무 팥배나무 서어나무 수백 그루를 몰래 캐두었다가 경찰에 적발된 것.

수사 결과 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그들은 땅 주인 H 씨의 사주를 받아 이런 일을 한 것. H 씨는 이곳에 승마장을 만들려 했으나 ‘이 숲은 나무가 많고 보존가치가 높다’는 이유로 허가가 나지 않자 수목축적도를 낮추기 위해 나무를 파내도록 했다. 작년 6월과 8월에도 인근 곶자왈의 다른 땅주인 두 K 씨가 비슷한 일을 하다 각각 경찰에 붙잡혔다.

이런 일이 자꾸 되풀이되는 것은 전체 곶자왈의 60%인 66km²가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곶자왈은 관리보전지구 1∼4등급으로 등재된 생태계의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지주들은 보존 의무만 질 뿐 그에 따른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충돌한 것이다.

이런 경우 흔히 ‘엄한 법’을 만드는 방식으로 대응하기 쉽지만 이해상충 상태를 방치하면 좀처럼 성공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코끼리 밀렵이 문제되자 케냐는 처벌을 강화했지만 해결이 힘들었다. 반면 짐바브웨는 사냥을 허용하되 자기 땅에서만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코끼리를 사실상 사유재산화하자 땅주인에겐 코끼리를 보호, 유인할 이유가 생겼고 개체 수는 늘었다(‘맨큐의 경제학’에서). 사회 이익과 개인 이익을 일치시킨 것.

코끼리 사례와는 발상이 전혀 다르지만 제주도민들도 나름의 해법을 찾아냈다. 곶자왈 보전조례를 제정하는 등 환경규제는 강화하되, 그와 별도로 ‘곶자왈 1평 사기’ 운동을 시작한 것. 도민들은 작년 4월 내셔널트러스트(자연신탁국민운동) 형태의 ‘곶자왈공유화 재단법인’을 설립했으며, 이 재단은 향후 10년간 350억 원의 기금을 마련해 곶자왈 사유지의 10%를 매입하기로 했다. 기금 조성에는 제주도민은 물론 제주은행 대한항공 제주농협 제주KT 제주한전 등 기업이 동참했다. 땅주인에게도 합당한 대가를 치르겠다는 것. 사회 이익과 개인 이익을 조화시키는 접근이었다.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트러스트는 국민의 자발적인 기부를 토대로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 및 문화유산을 매입해 영구 관리하려는 운동이다. 사유자산에 공공재 성격이 짙을 경우 ‘발생하는 편익’에 맞도록 재산권을 재정리하는 것. 현재 국내에서는 광주 무등산, 강화도 매화마름군락, 서울 성북동의 최순우 고택(古宅) 등에 대해 트러스트가 발족돼 보존활동을 펴고 있다.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치는 애국자는 많지만, 세금 더 내겠다는 애국자는 찾기 힘들다. 재산권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코끼리, 곶자왈 문제도 ‘보존’ 명분만 외쳐서는 해결이 쉽지 않다. 그리고 세상사의 난제(難題)는 이처럼 둘 이상의 이익이 부닥치면서 대개 생겨난다. ‘실용주의’를 내건 새 정부가 출범했다. 실용이란 게 어디 멀리 있을까. 제주도민들처럼 눈을 밝게 뜨면 가장 가까이 있으니 실용 아니겠는가.

허승호 경제부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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