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상영]아마추어의 정부, 프로의 정부

  • 입력 2008년 1월 3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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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다 보면 당초 그 일을 왜 시작했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때가 있다. 일 자체가 목표가 되어 본래의 뜻을 오히려 훼손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예컨대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돈을 벌려고 하지만 이 과정에서 돈의 노예가 되어 불행해지는 사례를 우리는 흔히 본다. 이런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상황을 영어로는 ‘꼬리가 개를 흔든다’고 한다던가.

이념이 삶보다 우선하면 주객전도

이념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는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개념이다. 현실의 문제에 어떤 방식으로 대처하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더 기여할까 고민할 때 활용하는 도구일 뿐이다. 결코 이념 자체가 사람의 삶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와 반대되는 상황이 한둘이 아니다. 예를 들어 좌파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무조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성토하고,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고, 종합부동산세에 찬성하고, 교육 3불정책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파 또한 모든 사안에서 좌파의 반대에 서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지만 현실을 꼼꼼히 따져보면 선택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난 개인적으로 한미 FTA는 일부 보완장치가 필요하지만 반드시 체결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는 처음엔 찬성했고 지금은 철군 시점을 논의할 때라고 생각한다. 종합부동산세는 1가구 1주택자나 은퇴한 연금생활자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지만 정책 타당성을 인정한다. 교육 3불 정책에 대해선 일부 찬성, 일부 반대다. 그렇다면 이것은 좌파인가, 우파인가.

프랑스혁명 이후 좌파와 우파라는 용어가 생겨난 지 200년이 넘었다. 당시와 비교해 세상은 엄청나게 복잡해졌는데 모든 사안마다 좌파냐 우파냐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시점의 이 문제’에 대한 치열한 해석 없이 이념에 따라 행동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다. 이념은 현실에 기초해 탄생했지만 현실은 이념이 상정한 대로 움직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정부 부처를 취재하면서 얻은 교훈 가운데 하나는 거창한 정책구호보다는 상황에 따라 완급을 조절해 가는 미세조정(Fine Tuning)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어떤 정부든 그럴듯한 정책을 공약한다. 하지만 이를 실제로 집행하는 단계에서는 예상치 못한 복잡한 문제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정교하게 대처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당초의 정책목표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노무현 정부의 주택정책이 전세금 부담을 늘려 저소득층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념으로 현실을 재단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추어 정부라는 오명을 얻었다.

국리민복 위한 초심 잃지 말아야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우파지만 개혁의 추진력을 얻기 위해 좌파와 중도파를 끌어들이고 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좌파였지만 ‘제3의 길’이라며 우파적 정책을 받아들였다. 한국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 그린벨트 설정,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 토지공개념 제도 도입 등 좌파적 정책을 수용한 경험이 있다. 정책 선택이란 이런 것이다. 시대적 특성과 상황에 따라 최적의 선택을 하는 것이지 이념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참여정부 386은 바로 이 점에서 아마추어였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얼마 전 첫 인수위 워크숍에서 “지난 5년간 업무가 전부 잘못됐다는 부정적 선입견을 갖고 시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고 했다. 적절한 언급이다. 5년 동안 경험했듯이 과거 정부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아진다.

꼬리가 개를 흔드는 상황을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초심(初心)을 잃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정부가 가져야 할 초심은 국가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이다. 이 초심을 항상 기억한다면 이념이나 방법론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김상영 편집국 부국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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