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기홍]韓-美정부 국장 자리 누가 높을까

  • 입력 2008년 1월 3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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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4일엔 9초, 31일엔 12초….

요즘 미국 상원에선 민주당 의원들이 주도하는 ‘번갯불 회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휴가 시즌이라 텅 빈 의사당에서 의원 혼자 의사봉을 들고 개회를 선언한 뒤 곧바로 “산회하고 ○월 ○일 다시 개의한다”며 끝내 버린다.

‘각자가 다 대통령’이라 불릴 만큼 막강한 위세를 지닌 미국 상원의원들이 당번을 정해 휴가지에서 워싱턴으로 날아오면서까지 ‘1인 회의’의 바통을 이어 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법무부 차관보를 임명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다. 민주당은 새 차관보 지명자가 테러 용의자 신문 기법에 찬성했던 전력을 문제 삼고 있다.

차관보급 이상은 상원의 인준을 거쳐야 하지만 회기 중이 아닐 경우 대통령이 곧바로 임명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1월 22일 의회가 정식 소집될 때까지 형식상 회기를 유지하기 위해 ‘반짝 개의-산회’를 반복하고 있다.

낯선 장면을 지켜보면서 ‘차관보(한국의 국장급에 해당) 정도 자리를 놓고 뭐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여러 정부 부처를 출입해 본 기자는 국장 자리가 얼마나 중책인지를 잘 안다. 그럼에도 ‘겨우 국장 자리’라는 생각이 잠깐이나마 들었던 것은 청와대 1, 2급 비서관 자리는 물론이고 장관, 공기업 기관장과 감사 등 고위직을 일천한 경력의 ‘코드 공신(功臣)’들이 거리낌 없이 나눠 갖고 승진 파티를 벌이는 걸 숱하게 목도한 영향인 것 같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권 창출 공신들의 요직 진출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미국에선 자리에 걸맞은 검증된 경력이 요구된다. 의회와 여론이 인정하고 공감할 만한 ‘성공의 기록’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부시 행정부에서 대표적인 ‘캠프 참여 전문직 발탁 인사’로 꼽히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경우도 교수라는 경력만으로 중책을 맡은 건 아니다.

라이스 장관은 스탠퍼드대 평교수 생활 12년째인 1993년 대학 재무·학사 담당 총책임자(provost·학장)로 발탁돼 연간 2000만 달러씩 적자를 보던 학교 재정을 2년 만에 1450만 달러 흑자로 바꿔 놓는 뛰어난 경영능력을 보여 줬다. 1989∼91년엔 백악관 소련·동유럽 담당 국장으로도 일했다.

학자의 공직 참여 문화에도 차이가 있다. 미국 교수들도 행정부에 활발히 참여하지만 자기 전공과 관련된 정책분야 책임자(차관보나 국장)로 일한 뒤 대학으로 돌아가는 게 상례이고 이를 매우 명예롭게 여긴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고위 공직은 대수롭지 않은 전리품처럼 평가절하되는 ‘서글픈’ 처지지만 막상 그 자리에 주어진 혜택은 미국 저리 가라다.

그동안 방문해 본 미국 고위직들의 집무실은 한결같이 작고 소박했다. 대개 책상과 작은 소파, 책장이 전부다.

반면 한국은 “민원인들이 ‘장관실을 점거했다’고 의기양양해했는데 실제론 부속실의 방 중 하나였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대부분의 고위직은 일반인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고급스럽고 널찍한 공간과 다양한 물적 지원을 받고 있다.

물론 근무 여건이 좋으면 더 좋은 생산성을 기대할 수도 있다. 다만 “낮은 곳을 향해 살았다”고 외치다 입성한 운동권 출신 고위직들 가운데 고급스러운 집무실, 승용차, 거액의 판공비 카드 등 특권들을 부담스러워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 국민에게 송구스러워 스스로 사양하거나 불편해 어쩔 줄 모른 사람이 있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기홍 워싱턴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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