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별]<끝>의사 하지현의 역할모델 ‘동물원’ 김창기

  • 입력 2007년 12월 22일 0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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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삭임, 잊혀진 세월을 불러내고… 나를 흔들고…

별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라고, 언젠가는 너도 그렇게 될 거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지만 항상 내겐 공허하게 들렸다. 도저히 쫓아갈 수 없이 높은 경지에 오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즐겁지만,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수준의 연상까지 가기 전에 지레 질려 버렸다. 내게 스타란 그런 존재였다. 그 노래를 듣기 전까지는 최소한.

어느 날 귀에 쏙 박히는 노래를 만났다. ‘아,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가당치 않은 자신감을 주는 노래, 복잡하지 않은 악기 구성, 단순한 코드,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편하게 부르는 듯한 목소리. 가사 하나하나가 옆집 형이 내게 얘기해 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그런 곡들, ‘동물원 1집’의 노래들이었다.

많은 사람은 김광석이 부른 ‘거리에서’를 좋아하지만 그의 빼어난 미성은 ‘딸 수 있을 만한 별’이 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들국화나 해바라기가 그랬듯, 범접하지 못할 먼 곳에서 특이한 삶을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스타의 향취가 배어 나왔다.

그러나 김창기는 조용히 낭송을 하듯이 읊조렸다.

‘우∼ 그리움으로 잊혀지지 않던 모습, 우∼ 이제는 기억 속에 사라져 가고, 사랑의 아픔도 시간 속에 잊혀져 긴 침묵으로 잠들어 가지’라며 ‘잊혀지는 것’에 대해 노래했다. 그랬다.

잊고 있던 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사랑 한 번 제대로 못해 본 주제에 벌써 사랑의 쓴맛을 다 본 사람인 양 음미하게 만드는 목소리. 그렇지만 먼 곳의 얘기가 아니라 그냥 내 친구가 실연을 당한 뒤 소주 한잔 마시며 천천히 자기 마음을 복기하는 듯한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런 것이 가능하구나’라고 생각하며 내게도 뭔가 끼적거릴 용기를 줬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난 의대를 다니면서 글을 쓰고, 연극판에 기웃거렸다.

시간이 지나 나는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과 전공의가 되었다. 파견 나간 병원에서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을 만났다. 동물원의 김창기도 전공의가 돼 다른 대학에서 파견을 나온 것이었다.

평소 그를 흠모해 마지않던 나는 며칠 동안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바로 내 옆 테이블에 앉아서 환자에 대해 얘기하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같이 먹는 이 사람이 내가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듣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혼자서 상상했던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만난 사람은 누구였는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던 그가 바로 ‘잊혀지는 것’에서 얘기하던 ‘그녀’였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나만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고, 그가 아마도 수백 번은 들어 봤을 법한 뻔한 질문을 나까지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나름의 배려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손을 뻗치면 바로 잡을 수 있는 곳에 ‘별’이 있다는 것, 소탈하고 선해 보이는 그의 미소가 연출된 것이 아닌 ‘일상’임을 확인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사실, 그가 부러웠다. 그는 자기 본업을 택해서 수련을 받고 한편으로는 여전히 노래를 만드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이상하게 질투심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았다. 보통의 나 같으면 ‘어딘가 모자란 곳이나 잘못하는 것이 있겠지’라며 가까이서 그를 훑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와 지낸 시간 중 1996년 1월 어느 날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어제 술 많이 하셨나 봐요?” 은근슬쩍 말을 건넸다. 그는 “광석이가 갔어요…”라고 말했다. 아무 말도 더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파견 기간이 끝나 우리는 한 번의 술자리를 갖고 헤어졌던 것 같다. 이렇게 그와 나의 인연은 끝났다. 시간이 흘러서 나도 전문의가 되었고, 그가 소아정신과를 개업해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학생 때 동물원 콘서트의 열혈 관객이던 나는 이제는 그들의 공연을 보러 가지 않게 되었고, 그 또한 젊은 시절의 추억을 뒤로하고 사회인의 삶을 살고 있다.

어쩌면 김창기는 취미가 본업이 되는 괴로움을 진작에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인 선에서 타협을 하는 그에게서 지금의 나를 떠올린다. 나는 정신과 의사라는 본업이 있지만 한편으로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몇 권의 책을 내고,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를 하고, 매번 새로 쓰고 싶은 책의 아이템을 잡는 일이 무엇보다 즐겁다. 잘 팔리지도 않는 책, 그렇지만 누구도 쓰지 않은 나만의 내용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하는 일이다.

내게 김창기는 ‘정말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한번 해봐, 재미있거든. 인생 별거 있니?’라고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동일시를 할 대상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꼭 그처럼 되지 않는다 해도, 나도 모르게 어딘가 닮고 쫓아가게 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그런 존재를 보존할 필요가 있었기에 나는 예전에 그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안달복달하지도 않았고, 시기나 질투를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금 여기 글을 쓰고 있게 된 것이다.

하 지 현 건국대병원 정신과 교수

▼“음악이요? 지금은 가족이 더 소중”▼

“하 선생님요? 지금 건국대 계시고 영화평도 많이 쓰시고 유명한 영화감독(고 하길종 감독) 아드님이시고 친절하고 똑똑하고…, 근데 그런 분이 절 왜요?”

현재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소아정신과를 운영하고 있는 김창기(44) 씨는 자신같이 ‘잊혀진 사람’을 왜 하지현(40·사진) 교수가 ‘별’로 꼽았는지 의아하다며 한참을 어리둥절해했다.

하 교수가 좋아하는 이유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도 본업을 유지하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어도 그는 여전히 쑥스러워했다.

“하 교수님이야말로 여러 분야에 열정을 가진 훌륭한 분인데…. 저는 그렇게 열정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동료들에게 좀 미안한 말일 수도 있지만, 그에게 음악은 그냥 취미였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여자친구가 없어 데이트 약속도 없었던 젊은 시절에는 김광석 같은 친구들과 노래 만드는 게 그냥 재미있었단다.

물론 지금도 음악을 사랑하지만 이젠 의사로서의 일과 가족과의 행복한 삶이 그에겐 더욱 중요하다. 예전에도 그냥 노래를 만드는 것이 좋았을 뿐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은 불편했단다. 동물원이 20주년을 맞았지만 그는 무대에 서지 않고 그냥 조용히 응원할 예정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음악은 저에게 좋은 친구였고 제 자신을 달래는 도구였던 것 같아요.”

그가 운영하는 소아정신과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 중에서 “이 선생님이 옛날에 유명한 가수였단다”라고 얘기해 주는 사람이 가끔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이렇게 반응하는 아이도 있단다. “흥, 이렇게 얼굴이 세숫대야만 한 가수가 어디 있어?”

“사람들이 가끔 기억해 주고 그러면 고맙고 자신감도 생기죠. 그렇지만 다 옛날 얘기잖아요.”

누군가의 별이었던 그는 그렇게 평범한 생활인이 됐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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