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지향]대선 당선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 입력 2007년 12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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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후 네 차례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내가 선택한 후보가 흡족해서 투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후보들의 도덕성 때문이 아니다. 누구에게 표를 줄지를 결정할 때 도덕성을 크게 고려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정치인이라는 부류는 도덕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대신 두 가지를 따져봤다. 하나는 과연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인물인지이고 다른 하나는 유능한 사람인지였다. 한데 그 둘이 일치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5년 전 노무현 후보는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능력에서는 신뢰할 수 없는 후보였다. 그런 우려는 사실로 드러나, 지난 5년간 우리 사회의 잠재력은 한참 후퇴했다. 하지만 그동안 소외되었던 부문을 양지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한번은 치러야 할 과정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다음 주 확정될 당선자는 좌파 정권이 저지른 시행착오를 바로잡고 죽을힘을 다해 선진사회로 도약하는 노정을 이끌어야 한다.

경제 살리기는 말할 것도 없고 국민을 우리와 저들로 분열시켜 생긴 상처를 보듬는 일이 시급하다. 대통령부터 나서서 법을 하대하는 바람에 ‘법과 질서’가 엄격히 유지되는 사회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공정한 사회라는 자명한 사실도 지난 몇 년간 잊혔는데, 이제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더욱 어려운 문제는 평준화가 불러온 악폐를 제거하는 일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세계는 수월성에 바탕을 둔 치열한 경쟁시대에 접어든 지 오래다. 그 냉엄한 사실을 인정하고 경쟁력 제고를 위한 장기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분열의 상처 보듬는 일 시급

쓸데없이 방만해진 정부 규모도 줄여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국가가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지향할 때 우리만 크고 비효율적인 정부를 만들었다. 비대한 정부는 불필요한 규제를 일삼기 마련이다. 물론 질서를 유지하는 정부의 역할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 일에 큰 정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세금 내는 것이 아깝지 않은 나라에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모든 사람이 공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조세제도가 속히 확립되어야 한다.

폴 케네디나 닐 퍼거슨 같은 학자들은 역사상 존재했던 강대국의 조건으로 ‘공정한 조세제도’를 가장 중요하게 들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납세 가능한 국민 가운데 반 이상이 세금을 내지 않거나 적게 내고 있다고 한다. 누진세는 필요하지만 최대한 많은 국민이 납세에 참여하는 것이 좋다. 적은 돈이라도 세금을 낸다는 긍지가 건강한 주인의식을 배양한다. 정말 힘든 소수를 제외하고 모든 국민이 조금이라도 납세의 의무를 다할 때 진정한 시민의식이 확립될 것이다.

공정하게 걷은 돈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남의 돈 10만 원은 내 주머니의 1만 원보다 못한 법이지만 국민이 낸 세금 10만 원을 자기 돈 10만 원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공무원과 정부를 가져보는 게 소원이다.

나아가 새 정부는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도약시켜 일류 사회로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선진화의 핵심은 ‘공급자 위주’가 아니라 ‘수요자 위주’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특정 과목 교사가 그 학교에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어쩔 수 없이 그 과목을 배워야 하는 식의 공급자 중심주의는 이제 떨쳐 버리자. 교육도, 경제도, 행정도 수요자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는 선진사회를 만들어 내자. 마지막으로 새 지도자는 지난 10년 동안 ‘우리 민족’과 ‘과거’에 고정하도록 강요되었던 국민의 눈을 돌려 ‘세계’와 ‘미래’를 향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수요자 위주 일류사회 만들어야

지금 시대정신은 이 모든 일을 요구하고 있다. 한데 그런 의식을 갖추고 그런 과업을 해낼 능력이 있는 후보가 있기나 한 것인가. 유권자들도 할 일이 있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은 ‘위대한 국민이 위대한 정부를 만든다. 그 역이 아니다’라고 설파했다.

위대한 지도자를 요구하기 전에 국민이 먼저 위대해지도록 노력해야 하며, 지도자와 국민은 서로에게 힘을 실어 주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이번에야말로 시대정신과 능력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춘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 이번에는 흡족한 표정으로 투표장에 갈 수 있을까?

박지향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서양사 jihangp@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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