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미경]여성 유권자와 ‘정치적 유행’

  • 입력 2007년 12월 12일 03시 01분


코멘트
7년 전 이란 출장을 갔을 때 마침 총선 기간이었다.

통역을 맡고 있던 이란 여성은 투표하러 간다며 남편부터 찾았다. 남편, 아버지, 남동생 등 가족 중 남성 구성원을 대동해야만 투표소에 입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성의 투표를 어렵게 하는 불합리한 조치 아니냐”는 기자의 지적에 그는 답했다.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에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투표조차 못하는 이웃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당시 중동 여성의 투표권을 둘러싼 제약들은 그들의 얼굴을 감싼 베일만큼이나 견고했다. 투표권을 허용하지 않는 국가가 대부분이었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갖가지 제한 규정이 따라붙었다.

이랬던 중동 지역에서 최근 1, 2년 사이 여성 투표권을 둘러싼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쿠웨이트 의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선거권을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가장 보수적인 사우디아라비아도 지방자치 선거에서 여성 투표권을 허용하기로 했다.

미국도 내년 대선의 키워드를 일찌감치 ‘여성’으로 정하는 분위기다. 특히 전체 유권자의 30%에 육박하는 싱글 여성의 표심은 이번 대선 결과를 가르는 중대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여성 투표율로 볼 때 우리나라는 결코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는다. 2002년 대선 때 여성 투표율은 70.3%였고 이번 선거에서도 비슷한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투표소로 향하는 많은 여성의 발걸음이 가벼울 것 같지는 않다. 최근 한국선거학회 조사에 따르면 ‘내가 던지는 한 표가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진 여성은 4명 중 1명도 안 됐다.

여성단체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에 참석했던 한 주부는 “투표는 하겠지만 기억에 남는 보육, 일자리 공약을 내놓은 후보는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영유아 무상보육에서 아예 ‘가정행복’을 슬로건으로 내건 후보까지 다양한 여성공약을 제시하고 있지만 정작 여성 유권자들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다른 것이다.

미국여성정치센터(CAWP)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세계 곳곳에서 주목받는 여성 유권자 파워는 금방 식어 버리는 ‘정치적 유행(political fad)’으로 끝나기 쉽다”고 지적했다.

정치인들은 부동층이 많은 여성 유권자를 잡기 위해 실현 가능성이 낮은 정책을 쏟아 내고, 여성들은 다른 유권자 그룹보다 이런 정책을 검증하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이 보고서는 설명했다.

또 다른 미국 여성단체 ‘여성의 목소리, 여성의 투표(WVWV)’는 “선거철 ‘반짝 스타’에서 벗어나려면 여성 자신부터 정치, 정당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면서 좋은 후보를 고르기 위한 5개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여성정책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후보는 후순위로 밀어낼 것. 둘째, 공포심에 호소하는 후보는 고르지 말 것. 셋째, 정책이 얼마나 많은가보다 실현 가능성을 먼저 볼 것. 넷째, 다른 후보의 단점보다 자신의 장점을 내세우는 후보를 고를 것. 다섯째, 리더십과 인간적 호감도를 반반씩 볼 것.

19일 대선에서 아직 찍을 만한 후보를 못 골랐다면 이 5가지 조건을 참고삼아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은 어떨까.

정미경 교육생활부 차장 micke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