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NLL 사수, 軍을 믿는다

  • 입력 2007년 10월 17일 20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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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군(軍) 담당기자 시절 2년간, 판문점 취재는 정말 싱거웠다. 군사정전위원회 회의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판문점으로 향했지만 긴장감은 별로 없었다. 특히 북한 측의 요청으로 열리는 회의는 너무도 뻔했다. “조선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자주통일을 가로막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핵무기 철거,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가….” 북측 대표는 늘 이런 식의 준비된 유인물을 앵무새처럼 읽어 내려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지금 되돌아보면 천편일률적이던 그들의 당시 요구는 이미 실현됐거나 빠르게 실현되는 과정에 있다. 소름 끼치는 변화다.

남한에 배치돼 있던 미국의 전술 핵무기는 이미 노태우 정부 시절 완전 철수했다. 국가보안법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사이 있으나마나 한 법으로 전락했다. 주한미군도 2012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한국 단독 행사)과 한미연합사 해체를 앞두고 사실상 이름만 남길 확률이 커졌다. 유사시 미국이 공군력 위주의 대규모 증원군(增援軍)을 보낼 계획이라지만 이 역시 미지수다.

미군은 판문점을 비롯한 최전방에서 후방으로 나앉았고, 용산기지는 남쪽의 평택으로 이사 갈 준비로 바쁘다. 북의 남침이 있어도 미군이 자동 개입하는 인계철선(trap-wire) 역할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반면, 북은 우리 정부가 햇볕정책, 포용정책에 취해 있는 동안 뒷구멍에서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려 지난해 핵보유국 대열에 끼었다. 남북 간의 군사력 대칭관계를 무너뜨린 격변이었다. 그런 판에 노무현 대통령은 이달 초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서해평화협력지대 아이디어를 내놓아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불가침선(不可侵線)에서 가변선(可變線)으로 바꾸어 버렸다. “NLL은 영토선이 아니다”는 묘한 논리로 NLL 협상의 문을 열어놓았다.

북이 NLL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면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게 군 관계자들과 다수 전문가의 견해다. 11월 평양에서 열릴 남북 국방장관회담은 북의 꽃놀이마당이 될 것이란 우려가 많다. 북으로선 서해 5도 주변의 어업권, 제해권(制海權) 획득은 물론이고 수도권에 결정적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는 셈이다.

미국 핵무기, 주한미군, 국가보안법에 이어 NLL마저 뚫려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NLL은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우리의 최후 방어선이다. 2001년 이후 지금까지 북 경비정이 NLL을 65회나 침범한 것은 바로 서해를 분쟁지역으로 만들려는 집요한 획책이었다. NLL이 무너지면 1999년 연평해전과 2002년 서해교전 같은 충돌이 더욱 잦아질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김장수 국방부 장관은 장관직을 걸고 NLL을 지키겠다는 뜻을 군 내부에 밝혔다고 한다. 그는 어제 국정감사에서도 “NLL을 양보하거나 열어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다짐했다. ‘NLL 함구령’을 내린 해군의 속뜻 역시 NLL 사수에 있을 것이다.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영토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에 군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어제 대(對)국민성명을 낸 역대 국방장관과 각군 참모총장 등 예비역 장성들의 충정도 국민에겐 든든하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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