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육정수]국정원의 법정증언 거부

  • 입력 2007년 10월 17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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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전신)에 도착해 지하실로 내려갔다. 군청색 군복으로 갈아입은 다음부터 상당시간 동안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다. 주황빛 전구가 괴물의 눈처럼 침침하게 비추는 방에서 참기 어려운 폭행을 당했다. (중략) 간부가 나타나 협박과 폭언을 퍼붓기 시작했다. “당신을 비행기에 태워 제주도로 가다가 바다에 버릴 수도 있고, 자동차로 대관령 깊은 골짜기에 데려가 땅에 묻어 버릴 수도 있다.” (중략) OOO 기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옆방에서 들려왔다.

▷1980년대 중반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인사의 저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국가정보기관이 지난날 ‘국익’을 핑계로 언론인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서슴지 않았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당연히 가혹행위이고 중대한 범죄행위다. 밖에 나가 일절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도 써야 했다. 더욱이 고문의 직간접 가담자들이 형사처벌을 받은 경우는 듣지 못했다. 이런 명백한 범죄까지 ‘직무상 비밀’이란 이유로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엔 국정원 측이 김대중 정부 시절 불법 감청 사건에 대한 항소심 법정의 증언을 거부해 말썽이다. 관계 직원들의 증언을 허용했던 1심 재판 때와는 180도 달라진 태도다. 1심 재판 때의 검찰 출신 김승규 전 원장과 현재의 ‘골수 정보맨’인 김만복 원장의 생리가 다르기 때문일까. 통신감청부서 총책임자(8국장)였던 김모 씨는 1심 때 증인으로 나와 국정원의 불법 감청 사실과 임동원, 신건 전임 원장의 책임을 인정해 유죄판결을 받게 했다.

▷지금 국정원은 비공개 증언조차 거부하고 있다. 신분 노출과 활동 제약을 이유로 내세운다. 그러나 ‘직무상 비밀’을 규정한 국정원직원법이 불법 감청을 중대 범죄로 보는 헌법 및 통신비밀보호법, 그리고 사법(司法)의 권위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 신분 노출 핑계도 설득력이 약하다. 김 원장만 하더라도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 협상 후와 이번의 남북 정상회담 전후에 신분을 한껏 노출했다. 하기야 대통령부터 내 편할 대로 주장하기 일쑤이니 충복들이 흉내 낼 만도 하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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