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포퓰리즘은 ‘팜 파탈’처럼

  • 입력 2007년 10월 10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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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묘한 느낌이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북한에서 ‘인민’이란 용어를 버젓이 방명록에, 그것도 두 번씩이나 쓰는 모습을 봤을 때.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 참석차 방북 중 만수대의사당에서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 주권의 전당”이라고 썼다. 남포의 서해갑문에서는 “인민은 위대하다”라는 문구를 남겼다.

알다시피 ‘인민’은 좋든, 싫든 언어 습관에 따라 ‘색깔’을 띤 단어다. 두산세계대백과 사전은 “오늘날 인민은 계급적 시각에서…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인민보다는 국민 또는 시민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고 기술한다.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의 군 통수권자가 계급투쟁적 색깔이 짙은 ‘인민’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쓰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 더구나 북한의 의회인 만수대의사당이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곳도, ‘인민 주권의 전당’도 아니라는 점을 다 아는 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참석하지도 않은 환영 만찬에서 김 위원장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며 “위하여”를 외치는 대통령을 바라보는 자국민의 자존심도 한 번쯤은 헤아려야 했다.

지나치게 ‘오버’한 노 대통령의 방북 행보에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논리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노 대통령의 태도는 대략 2004년 말을 기점으로 달라진다. 그 전에는 ‘회담 개최가 북한 핵 문제 진전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시기, 장소를 안 가리고 수용하며, 추진하고 싶다’고 말이 바뀌었다.

2004년 말은 탄핵 사태와 총선으로 치솟았던 그의 지지율이 경제 실정(失政)과 잦은 말실수, 행정수도 이전 위헌 판결 등의 역풍을 맞아 본격적으로 급락할 때였다. 이후 대연정 같은 반전카드가 실패할수록 노 대통령과 주변은 정상회담에 매달렸다. 이런 회담이 성사됐으니 정치적 오버는 군사분계선을 넘을 때부터 예고돼 있었다.

더욱이 이번 회담의 합의는 사실상 임기가 끝나는 대선을 2개월여 앞둔 대통령으로선 결제 불가능한 어음을 발행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차기 정부의 정치적 부담과 예산으로 결제하라는 뜻이다.

남의 돈으로 기분 내는 것이야말로 포퓰리즘 정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대표적인 포퓰리스트인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미국 뉴욕의 빈민들에게 싼 난방 연료를 제공하고, 아프리카의 반미 정권에 원조금을 대며, 쿠바와 아르헨티나에 수십억 달러 상당을 지원하기도 했다. 오일머니가 자기 돈인 것처럼.

어쨌거나 정상회담 이후 노 대통령의 지지도는 50%를 상회하고 있다. 남의 돈이 됐든 고리채가 됐든 일단 쓰고 봐야 한다는, 포퓰리즘의 치명적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중남미에서 보듯 포퓰리즘의 폐해는 박수쳤던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가지만, 작금의 한국 대선 상황에서 최대 피해자는 범여권의 대선주자들이 아닐까 싶다.

노 대통령이 커질수록 이들은 작아져만 간다. 노무현과 김정일의 드라마가 감동적일수록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 혼란은 비루하게 느껴진다. 친노 그룹 내에서 “노 대통령의 관심은 정권 승계보다는 퇴임 후 ‘노무현 정치’”라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다. 포퓰리즘의 유혹은 자기 손으로는 끊기 어려운 것 같다. ‘팜 파탈’의 유혹처럼.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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