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김용희]한국말의 품격이 무너진다

  • 입력 2007년 10월 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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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00년 전만 해도 한국인은 한국어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했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마음껏 수다 떠는 한국어를 할아버지 세대가 할 수 없었다니. 어머니에게 배운 언어가 아닌 남의 언어(일본어)를 학교에서 배우고 써야만 했다니.

드라마 ‘경성스캔들’을 본 딸아이는 말한다. “엄마, 일본 사람들도 모두 조선말 쓰던데?” “아아, 그건 드라마고….”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에게 모국어를 빼앗긴다는 것이 어떤 말인지 실감이 나질 않는다. 당연하다. 모국어로 말을 한다는 것은 숨구멍에서 숨이 들고 나는 것과 같다. 공기의 고마움은 공기가 사라질 때 비로소 각인된다.

이어령 선생님 인터뷰 갔다 들은 이야기 하나. 일제강점기 때 초등학교에서 한국말을 쓰면 바로 ‘후닥!(표 내!)’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담임선생이 자신의 도장이 찍힌 종이를 학생에게 10장씩 나눠 준다. 학생은 누가 조선말을 쓰면 ‘후닥!(표 내!)’이라고 소리친다. 일주일 뒤에 검사를 한다. 표를 제일 많이 가진 사람은 노트를 상으로 받고 표를 제일 많이 뺏긴 사람은 변소 청소를 했다. 아이들 사이에는 빼앗고 안 빼앗기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필사적인 언어전쟁이 벌어졌던 셈이다.

시골에서 온 어떤 아이는 조선말을 쓸까봐 처음부터 입을 다물어 버리다 벙어리처럼 되기도 했다. 어떤 아이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면 놀래 준다. ‘아이고머니나’ 하고 깜짝 놀라 소리치면 표 내놓으라고 한다. “아이고머니나가 왜 한국말이냐” “선생님에게 가 보자”라고 하면 일본인 교사는 “그건 한국말이다” 해서 표를 빼앗는다.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얘기는 언어가 해방됐다는 뜻이다. 언어가 해방되었다는 얘기는 숨구멍이 열리듯 몸이 해방됐다는 뜻이다. 인격이 해방된 것이다. 더는 언어 빼앗기 놀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시절, 자유롭게 모국어를 써도 되는 시절을 살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딸아이는 말한다. “엄마, 왜 나는 영어를 꼭 배워야 해요? 미국 사람들은 한국말을 안 배우는데?”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 그건 영어가 권력의 언어이고 기득권의 언어이기 때문이야.” “엄마, 근데 영화에 나오는 조폭은 왜 모두 무서운 말만 해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응 그건, 무서운 말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야.”

글로벌 시대에 영어는 필수라고 한다. 영어 실력은 화이트칼라 능력 측정의 바로미터다. 그러나 기업의 모든 부서, 모든 공장의 제조과정, 모든 기술직에 영어가 필요하지는 않다. 메이저 대학에서는 국문학과 국사학도 영어로 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이 모두 영어강박증에 시달린다.

자국어 언어 억압이 강박되는 다른 한쪽에서는 과격한 언어 배설이 일어난다. 1990년대 드라마 ‘모래시계’ 이후 지속되는 조폭의 세계와 그들의 언어는 스크린을 뚫고 시청자에게 다가온다. 욕설과 까발림은 권위주의에 대한 통쾌한 폭로와 저항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치인과 지도자의 말이 타락했고 언론의 말이 오염됐다. 누리꾼은 마녀사냥을 하듯 게시판을 욕설로 물들인다. 딸아이의 휴대전화 문자는 알 수 없게 축약된 은어가 대부분이다.

일본에서는 최근에 ‘품격’이란 말이 유행이다. ‘남자의 품격’ ‘여성의 품격’ ‘국가의 품격’이란 책이 불티나게 팔린다. 우리는 지금 한국어 검열과 감시의 시대를 거쳐 언어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한국어의 품격’을 다시 생각한다. 지켜야 될 자존심과 말의 아름다움을 지킬 윤리를 생각한다. 한글날이 다가오고 있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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