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상영]휠체어를 탄 회장님

  • 입력 2007년 9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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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재벌 총수들은 곤란할 때면 휠체어를 탄다.’

얼마 전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가 이런 제목으로 한국의 사법부를 비판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환자복에 휠체어를 타고 재판정에 나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이보다 며칠 전에 역시 집행유예로 풀려난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회장도 1심 재판 때 휠체어에 실려 재판정에 나온 일이 있다.

법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해야 한다는 기본질서를 갖추는 게 국가 이익에 더 부합한다는 취지에 딱히 반론을 펴기 어려웠다. 그래도 기사를 읽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외국 언론 “곤란할 때면 휠체어 타”

기사를 쓴 젊은 외국 여기자가 한국 재판부의 고민의 깊이까지 정확히 헤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집행유예 판결과 함께 ‘사회봉사명령’이라는 아이디어까지 짜낸 데서 우리는 재판부가 고심한 흔적을 발견한다. 재판부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의 고민도 함께 배어 있다.

문제의 본질은 사법부가 아니다. 국민경제에 대한 대기업의 엄청난 파급력과 기업이 잘 돼야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현실, 총수의 감옥행이 자칫 기업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져 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이번 판결에 담겨 있다. 문제는 이런 암묵적인 사회 분위기를 악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일부 대기업 오너의 그릇된 인식에 있다. 재판부는 이들을 대신해 욕을 먹었을 뿐이다.

오늘날 기업은 사회 변화의 선도자이자 가장 효율적인 집단이다(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 경제력을 키우려는 국가 간의 경쟁을 ‘전쟁’에 비유하는 시대에 기업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최전방 부대이다. 극단적 시장주의에 대한 자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기업을 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업의 힘은 이런 사회적 합의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대기업 오너들은 깊게 성찰해야 한다. 재벌 총수가 감옥에 가면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재판부뿐 아니라 국민도 잘 안다. 그래서 집행유예라는 일종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특권에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레드 라인(red line)이 있고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다. 이 선을 넘는 순간, 특권은 날카로운 칼날을 가진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지난해 기업홍보 담당자, 비정부기구(NGO) 종사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기업의 법 인식에 대한 흥미로운 조사가 있었다. 기업 홍보담당자들은 대체로 “법을 잘 지키면서 사업에 성공하는 게 중요한데 이러한 기본을 잘 지키고 있다”고 응답했다. 반면 일반인들은 “우리 기업들은 돈은 잘 벌지만 법과 윤리는 뒷전이다”라고 했고 NGO 종사자들은 “우리 기업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때운다”고 답했다.

이런 엄청난 인식의 차이가 생긴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압축 성장을 통해 발전하느라 자본주의 경험이 일천한 한국에서 기업은 아직 국민에게 다가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일부 총수의 행태가 기업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음은 부인할 수 없다. 오죽하면 기업을 취재하는 기자들 사이에 ‘총수가 사고 치면 백약이 무효’라는 말이 있겠는가.

사회봉사 앞서 진정성 보여 줘야

한화그룹은 19일 사회봉사단을 설립해 저소득층 아동 및 여성, 노인을 위한 활동을 펼치겠다고 발표했다. 김 회장에 대한 재판부의 판결이 영향을 미친 것이겠지만 이런 사회와의 소통 노력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 여론 무마용에 그쳐서는 안 된다. ‘내 기업’ ‘우리 기업’이라는 인식을 종업원과 국민에게 뿌리 내리려는 진정성을 보여 줘야 한다.

어쩌면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은 ‘회장님’들이 아니라 그들로 상징되는 대기업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더는 사법부가 고심하지 않도록 진정으로 사회와 국민의 존경을 받는 기업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김상영 편집국 부국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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