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제로 정부’

  • 입력 2007년 9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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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엔 ‘기록말살형’이란 게 있었다.

원로원의 결의로 전임 황제의 기록을 깡그리 없애는 형벌이었다. 공식문서에서 황제의 기록을 삭제하고, 공적비에서 황제의 이름을 파냈다. 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황제의 조상(彫像)도 파괴했다. ‘폭군 네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 황제 등이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위정자에게 치세의 기록을 말살하는 것처럼 잔인한 형벌이 있을까. 그런 형벌을 고안해 낸 로마인들은 인간의 본성과 정치의 속성을 잘 이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록량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노무현 정부는 정말 기록적이다. 거의 매일 쏟아 내는 ‘청와대 브리핑’과 ‘국정 브리핑’, 말을 시작하면 A4크기 용지 5장 분량은 예사로 넘는 노 대통령의 다변, 참여정부를 향한 언론의 무수한 비판 기사와 그에 대한 대통령과 정부의 반론들….

그러나 엄청난 기록의 성찬엔 먹을 게 없다. 기록만 많고 이룬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대연정도, 개헌도 추진해 봤다는 기록만 남겼을 뿐이다. 사상 유례가 없는 현직 대통령에 대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법 위반 경고와 이에 대한 노 대통령의 선관위 사전 질의, 헌법소원 제기 등 새로운 기록도 허다하다. 하지만 이 또한 역사에 남는 ‘신기록’이 될 공산은 거의 없다. 신기록이 되려면 성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기는 했다. 부동산 세제 개편과 여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밀어붙인 통합브리핑룸 공사 등이다. 이런 것들마저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후보는 물론 범여권의 대선 주자 대부분도 차기 정권에서 ‘원상 회복’이나 ‘대폭 조정’을 시사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다음 정권으로 가면 기자실이 되살아날 것 같아 확실하게 대못질을 해 버리고 넘겨주려고 한다”고 말한 것은 불안감의 표현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경호실장’을 자임하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이른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이라는 취재통제안의 수정을 공개 건의했다. 불안감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자칫 ‘참여정부’가 아니라 이룬 게 없는 ‘제로 정부’로 남을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현 정부가 남긴 그 많은 기록은 역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는 업적 중심으로 기록하고, 기억한다. 현 정권은 “수구세력과 언론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노 대통령도 최근 호주를 방문해 “결과를 이뤄 내지 못하는 리더십은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 성과가 없으면 실패한 리더십이다.

혹자는 차기 정부에도 남을 가시적 성과가 노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 진영의 봉하마을 개발이라고도 한다. 청와대는 “‘노무현 타운’이라는 악의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면 분명히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하지만 2002년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서울 가회동 빌라를 ‘이회창 가족타운’이라고 먼저 이름 붙인 것은 노 대통령이 속한 민주당이었다.

노 대통령의 고향 사저(대지 4290m²·약1300평)가 다소 큰 것 같다고만 생각하던 국민도 그 주변에 노 대통령의 형 부부와 지인(知人), 경호실 소유 등의 땅까지 합쳐 3만5000m²가량(약 1만600평)이 마련된 데는 눈살을 찌푸린다. 정권의 몇 안 되는 ‘가시적 성과’ 중 하나가 두고두고 구설에 오르지 않기를 바란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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