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당신들의 민주화는 유효한가

  • 입력 2007년 9월 10일 19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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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점심 모임에서, “시인 김지하(66) 씨가 민주화 운동을 하느라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내지 못 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 민주화 투쟁이 평생 멍에가 돼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랴. 그러나 ‘타는 목마름’으로 압제의 시대를 헤쳐 온 그의 상징성 때문인지 가슴이 아팠다. 서둘러 그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주간지(시사저널 1월 30일자)를 찾아보았다.

그는 “당신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바보였으니까 그렇게 살았다. 마누라 고생시키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애들 대학 못 가고, 두 놈 보기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다만 가족에게는 미안할 따름이어서 내 과거를 내가 자랑할 게 하나도 없다.”

그는 그러면서 울먹였다는데 그 얼굴 위로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예비후보 손학규 정동영 이해찬 유시민 한명숙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시인은 투쟁의 날들을 긍지와 한(恨)으로 가슴에 묻었지만 이들 5명은 이제 현실 참여의 정점인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 운동의 성격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한명숙을 뺀 4명이 김지하의 서울대 후배들이다.

진부하게 “민주화 운동을 팔아먹었다”는 식의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운동’도 결국은 권력욕의 발현일 터, 나는 그저 선후(先後)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TV 정책토론을 지켜보면서, 정책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느낀 것이다. 시인의 눈물과 대통령이 되려는 꿈 사이의 간격을 그들은 과연 메우고 있는가.

김지하의 눈물과 與 대선 주자들

그들이 했다는 민주화 운동의 진위부터 가려야 한다. 나는 운동의 깊이와 공과(功過)에서 5명이 모두 균일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들 중에 혹 시위하다 경찰에 끌려가 구류 며칠 산 것을 민주화 투쟁의 증거로 내세우는 사람은 없는지, 목적 지상주의에 빠져 무고한 민간인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준 사람은 없는지를 추궁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운동과 보상(報償)의 균형도 되짚어 봐야 한다. 설령 그들이 한 ‘운동’이 값진 것이었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나라의 핵심 고위직을 줄줄이 꿰찰 만한 것이었는지 따져야 한다. 정치권 진입 과정과 이후의 행적도 비켜 가선 안 된다. 언론을 통해 매명(賣名)하고, 정치 입문 후엔 기존 정치인 뺨치게 줄서기와 배신에 능하지는 않았던가.

이들 5명은 이른바 ‘민주화 세대’다. 각자 활동하던 시대가 조금씩 다르긴 해도 큰 틀에서 보면 맞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들에게 ‘과거의 민주화’에서 ‘미래의 민주화’로 넘어가는 문제에 대해 물어야 한다. 민주화 세대라면 답할 의무가 있다.

흔히 “우리도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됐다”고 한다. 조지프 슘페터가 언급한 것처럼 ‘민주적 절차와 방법에 의해 선거가 주기적으로 치러지고 있다’는 최소한의 절차적 개념으로서의 민주주의라면 또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선거민주주의로는 사회경제적 불의, 박탈, 불평 등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임혁백·세계화시대의 민주주의). 민주주의가 일상화, 내면화, 습관화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 공고화’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아직 멀었다.

세계화의 거버넌스(governance) 시대에 국민국가 시대의 민주주의는 변화가 불가피하며, 우리도 예외일 수는 없다. 국가주권의 비중이 낮아지면서 국가, 기업, 지방, 시민사회, 초국가기업들이 복합적으로 통치체계를 이루는 거버넌스의 시대에 한국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 문제로 고민하는 민주화 세대를 본 적이 없다.

거버넌스 시대, 입 닫은 民主세력

유시민은 지난달 18일 한 간담회에서 “민주화는 이미 이뤄졌고 새로울 게 없다. 내가 민주개혁세력이라고 해 봐야 ‘그래서 어쨌다고?’와 같은 답이 돌아온다”고 했다. 씁쓸하다. ‘민주화가 이미 이뤄졌다’는 그의 현실 인식도 틀렸지만, ‘민주화’라는 말만 들어도 국민이 냉소 짓게 만든 장본인들이 누구인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김지하 얘기가 나오자 한 후배는 “1986, 87년엔 유난히 분신자살한 아이도 많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 그들까지 다 아울러,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스러져 간 수많은 사람에게 이들 5명이 답해야 할 것들은 너무도 많다. 이들을 더 가혹한 검증의 시험대에 세우는 것이 민주화 시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될 것 같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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