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승련]‘한국의 체니’를 떠올리는 이유

  • 입력 2007년 8월 16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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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국실장급 이상 관리들의 저녁식사 자리 중에는 정치인들이 잘 모르는 자리가 있다. 관리들이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의원들에게 고압적인 추궁을 당한 직후 갖는 자리다.

한 관리에게서 “이런 식사 자리에서 우리끼리 그 사람들(의원들)을 뭐라고 부르는지, 기자 앞에서 옮기기 민망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 의회의 청문회 풍경은 좀 다르다. 증인으로 출석한 행정부 관리에게 호통을 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행정부 관리들도 사석에서 정치인에 대해 막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착각은 올여름 깨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차 워싱턴에 온 한국 고위 인사는 기자에게 “(FTA를 반대하는) 민주당 정치인이 형편없다고 미국 협상단이 말하더라”고 전했다.

민주당이 FTA 협상단으로부터 백안시되는 것은 한마디로 인기영합주의 때문이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6월 초 자동차의 본고장인 디트로이트에서 자동차 노조원들을 상대로 믿기 어려운 말을 했다. 그는 “한국은 미국 자동차산업에 손해를 입힌다. 그래서 한미 FTA에 반대한다”고 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힐러리 같은 국제주의자가, 그것도 ‘세계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힐러리가?

그는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FTA 문제로 표변(豹變)한 현장에 있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클린턴 후보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반대론자였다. 그러나 취임 후 1994년 의회 표결이 시작되자 앞장서 반대파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했다. 워싱턴에선 “남편이 그랬듯 힐러리도 대통령이 되면 한미 FTA 통과를 위해 힘쓸 사람”이라는 말이 들린다.

이런 포퓰리즘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 딕 체니 부통령이다.

테러용의자 고문과 이라크전쟁 정보 왜곡 때문에 지지율이 18%로 추락한 그는 지난달 백악관에 CNN의 카메라를 불러들여 인터뷰에 나섰다. 진행자인 래리 킹이 “사랑받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인기를 끌 작정이었다면 정치를 하지도 않았다. 나는 국가를 위해 어려운 결정을 하려고 이 자리에 와 있다”고 했다.

인기영합 정책을 펴지 않겠다는 자세는 남다른 점이다. 그러나 민심의 큰 흐름을 번번이 거스르며 지사(志士)적 열정을 홀로 밀어붙이는 것 또한 건강한 리더십과 거리가 있다.

우리 상황에 빗대 본다면 한국의 힐러리와 체니는 누굴까. FTA에 반대한 농촌지역 의원들을 떠올렸다.

올봄 신문에 FTA 반대자 명단이 실렸을 때 한나라당 L 의원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몇 해 전 방문한 그의 여의도 의원회관 사무실에는 가을걷이를 마친 고향 들판에 잠바 차림으로 쪼그려 앉은 그의 사진이 대형 액자에 담겨 있었다. 그는 장차관급 자리를 6차례 지낸 3선 의원이다. 17대 국회가 끝나는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70세가 된다. 그의 삶의 궤적은 산업화와 대외교역을 통한 성장기와 일치한다.

그에게서 “달걀이 날아오더라도 내 고향 사람을 설득하겠다. 조국의 장래를 위해 한미 FTA 체결은 불가피하다. 지역구 의원 한 번 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말을 기대한다면 무리일까.

지난달 워싱턴을 방문한 범여권의 W 의원은 기대에 가까운 말을 했다. 그는 “수도권의 내 지역구에 축산농가가 있지만 미국 쇠고기는 수입을 재개하는 게 바른 방향”이라고 했다.

그가 귀국한 뒤 숫자를 뽑아봤다. 그의 지역구에 있는 29만4000가구 가운데 축산농가는 8400가구였다. 단 3%였다.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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