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버지니아의 비극’을 넘어

  • 입력 2007년 4월 20일 21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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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에 울린 총성(銃聲)이 탄환이 되어 한국인들의 가슴에 박혔다. 여덟 살에 이민 가 스물셋이 된 한국인 학생이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亂射) 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지면서 한국인들은 충격과 당혹감, 죄스러움과 미안함의 집단심리에 빠져든 듯싶다.

‘학 다리’와 ‘바나나’

이번 사건은 인종이나 국적(國籍)의 문제가 아니다. 정신분열의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한 젊은이의 극단적 일탈(逸脫)이 빚어 낸 참극(慘劇)이다.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미국에서 종종 발생했던 ‘캠퍼스 총격사건’의 재현(再現)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한국인은 집단적인 죄의식을 느낀다. 내가 아닌 우리로서의 정체성, 즉 집단의 자기 인식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무고하게 생명을 잃은 희생자와 그 가족, 나아가 그들의 나라와 국민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그것이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도리에 맞는 일이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일 경우 이러한 집단의식은 무차별적인 분노로 치달을 수 있다. 만약 이번 사건과 같은 참극을 한국에 와 있는 미국인 학생이 저질렀다면 과연 우리가 그것을 개인의 일탈행위로 보아 넘길 수 있겠는가.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가정이 아닐 수 없다. 사건이 발생한 뒤 미국으로 자식을 유학 보낸 수많은 한국인 부모가 자기네 자식들이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은 바로 우리네 집단의식의 거울인 셈이다. 개인주의가 신조(信條)인 미국사회라고 해서 그런 집단의식이 없을 리 없다.

미국은 크게 나누어 개척자와 이민자로 이루어진 나라다. 17세기 초 일단의 유럽인들이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옮겨온 뒤 두 세기에 걸쳐 개척자의 후손들이 그들의 나라를 세웠다. 19세기 이후 이민자들이 새로운 나라에 몰려들었다. 1820년부터 2000년까지 6600만 명의 이민자가 미국에 왔다(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는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의 이민 1세대는 주로 1970년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다. 이민 1.5세대는 한국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한 경우이고, 이민 2세대는 미국에서 나서 미국에서 자란 세대다.

‘학(鶴) 다리’와 ‘바나나’― 10여 년 전 미국의 한인 사회에서는 부모인 이민 1세대와 자식인 이민 1.5∼2세대를 그렇게 구분했다. 대부분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고 미국 문화에 어두운 1세대는 한 발만 땅에 딛고 눈은 먼 곳을 쳐다보는 학처럼 미국에 와서도 한국만 쳐다보는 ‘학 다리 인생’인 반면에, 1.5세대와 2세대는 바나나처럼 겉은 노란데 속은 흰색, 즉 외양은 한국인인데 내용은 미국인인 ‘바나나 인생’이라는 얘기다.

‘학 다리’와 ‘바나나’ 사이에는 세대 차와 문화적 차이, 언어적 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갈등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부모인 1세대에게는 갈등을 풀어 나갈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 먹고살고 자식 공부시키기 위해서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에 매달려야 한다. 이제는 미국의 주류사회로 진출하는 1.5세대와 2세대도 늘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1.5, 2세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아웃사이더’로 방황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어떤 경우라고 해도 총기 난사 같은 극단적 일탈행위를 상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번 버지니아공대 사건을 미국 이민 1.5, 2세대의 현실과 결부시키는 것은 결코 합당치 못하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을 외면하면 부적응자의 일탈을 배양(培養)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포옹과 악수, 성숙한 인식

버지니아공대 총기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행사에 참석했던 미국 학생들이 한인 학생들과 거리낌 없이 포옹하고 악수를 나눴다고 한다.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필자 역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희생자와 그 가족, 그리고 버지니아공대 관계자 및 학생 모두에게 미안하고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울러 이번 참극에 대해 “한국인은 걱정할 필요 없다. 이번 일은 잘못된 개인의 일로 국한돼야 한다. 인종, 민족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라는 미국사회의 보편적 양식(良識)에도 감사한다.

악몽(惡夢) 같은 봄날이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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