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국사와 한국사

  • 입력 2007년 2월 20일 19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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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핏줄을 이어받은 한 민족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우리는 생김새가 서로 같고 같은 말과 글을 사용하는 단일민족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우리 민족에 대한 설명들이다. 고등학교 1학년 국사 교과서에는 ‘우리 민족은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단일민족 국가의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현실은 많이 달라졌다. 지난해 상반기 기준으로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53만6000명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1%를 차지한다. 국제결혼의 급증은 더 빠른 변화를 예고한다. 2005년 국제결혼은 전체 결혼의 13.6%를 차지했다. 농촌 지역은 3분의 1이 국제결혼이다.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고 있는 자녀가 2만5000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8000명이 초중고교에 재학 중이다.

교과서와는 다른 多문화 현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탈(脫)민족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올 한 해 우리 학계를 뜨겁게 달굴 것으로 전망된다. 단일민족이 갖는 배타성을 버리고 ‘열린 민족주의’와 ‘다(多)문화 사회’로 가야 한다고 주장해 온 탈민족주의 학자들은 학계에서 사실 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은 “민족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지고(至高)의 가치인데 왜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자꾸 꺼내느냐”는 핀잔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논쟁이 가열되는 것은 좌파 진영의 달라진 기류 탓이 크다. 요즘 좌파 일각의 두드러진 움직임은 ‘북한과 거리 두기’다. 때로는 북한 정권을 비판하면서 ‘정통 민주화 세력’의 유효성을 부각시키려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친미 좌파’라는 말까지 나온다. ‘친북 세력’으로 몰리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연말 대통령 선거에 앞서 현 정권과 차별화하려는 뜻이 깔려 있는 것으로 읽힌다.

‘민족’이라는 말을 가급적이면 내세우지 않으려는 좌파 인사도 늘어났다. 좌파 성향의 문인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명칭에서 ‘민족’이라는 말을 떼어내려 했고, 같은 성향인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 동조했다. 민예총 창설의 주역이었던 소설가 황석영 씨는 “동료 시인과 농담으로 ‘저 간판 언제 떼어 내느냐’며 헛헛한 웃음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상상하기 힘들었던 이런 변신은 냉엄한 국제 정세에서 비롯됐다.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 장단에 맞춰 계속 춤을 추다가는 통일이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남북한이 과도한 민족주의를 보이게 되면 사실상 통일의 열쇠를 쥐고 있는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오히려 견제를 받는다는 것이다. ‘남북한이 민족주의를 내세울수록 통일은 힘들어진다’는 새 현실론의 등장이다.

21세기 우리의 히트 상품인 한류(韓流)가 지나치게 민족주의를 강조한 나머지 외국에서 역풍을 맞고 있다는 가수 박진영 씨의 주장도 논쟁을 키우고 있다. 과잉 민족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면 선진국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당분간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분단 상황을 고려해 민족주의가 계속 유지돼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우리 내부의 민족주의 정서도 여전하다. 그러나 과거 철옹성 같던 민족주의 신화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과도한 민족주의 연착륙하려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잘못 쓰면 독이 되는 민족주의 정서를 어떻게 연착륙시키느냐에 있다. 그 단초는 역사 교육의 재편이다. 한국을 우월한 존재로 놓고 다른 나라와 문화를 주변적인 것으로 보는 ‘국사’의 틀에서 벗어나 국제 관계 속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한국사’로 전환하는 일이다. 그래서 젊은 세대에게 세계화 시대에 맞는 역사 인식과 가치관을 갖게 해야 한다. 민족주의는 민주화와 산업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공로를 인정하면서 우리는 아쉽지만 새 옷을 준비해야 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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