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정훈]‘통영 대꼬챙이’와 초심

  • 입력 2007년 1월 2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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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功) 부분이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오랜 정적(政敵)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하기 직전인 1997년 무렵이었다.

박정희 신드롬은 청소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어느 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에 박 전 대통령을 흉내 낸 선거 포스터가 등장한 일도 있었다.

그의 18년 독재가 종지부를 찍은 지 18년이 흐른 뒤에야 새로운 평가가 시작된 셈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쿠데타에 의한 군부의 집권이 불가능하리라는 확신이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자리 잡는 데 꼭 그가 집권한 기간만큼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시대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엊그제 법원의 재심에서 32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과거의 짓눌린 인식을 가슴속에서 지우고, 법원의 판결 같은 역사의 기록을 바로잡아 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사형이 확정된 1975년 4월 8일은 유신정권의 광기가 최고조에 이른 때였다. 같은 날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고, 고려대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당시 대법원 판결에서는 유일하게 이일규 대법원 판사(지금의 대법관)가 “사실심리를 하지 않은 재판 절차에 위법이 있다”며 원심인 비상고등군법회의 판결의 파기를 주장했다. 유신정권과 전두환 정권 때 여러 시국 사건에서 소수의견을 냈던 이 대법원 판사는 권력에 예속된 사법부에서 외로운 등불 같은 존재였다.

그의 사법부 독립에 관한 소신은 일본에서 ‘사법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고지마 이켄(兒島惟謙) 대심원장마저 통렬하게 비판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메이지 시대에 권력의 압력에 굴하지 않은 일로 명대심원장으로 평가받았지만, 하급법원의 특정 사건에 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바람직한 사법부 수장의 얼굴이 아니다”라고 꼬집은 적이 있다.

‘통영 대꼬챙이’로 불리던 이 대법원 판사는 민주화가 시작된 1988년 제10대 대법원장의 자리에 오른다. 이는 전국 법관의 절반에 가까운 430여 명의 판사가 서명에 참여한 2차 사법파동의 소산이었다. 그해 6월 대법원 구성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고 나선 2차 사법파동 때문에 김용철 당시 대법원장의 유임이 좌절되고, 후임으로 지명된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가 국회 동의를 받지 못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뒤였다.

내년이면 미수(米壽·88세)가 되는 이 전 대법원장은 지난해 2월 변호사 활동마저 접고 완전히 은퇴했다. 2차 사법파동의 주역이었던 소장 판사들은 지금 사법부의 중추가 돼 있다.

판결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진실 앞에서 등을 돌려야 했던 시대는 이미 흘러갔다. 그러나 검찰과 사사건건 충돌하고, 현직 고법부장판사가 판결에 승복하지 못한 전직 대학교수에게서 석궁 테러를 당하고, 중요 사건의 공판조서가 논란을 빚으면서 지금 사법부의 모습에서 ‘꼿꼿한 판관’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판사들 사이에서조차 법원 내부의 권력화니, ○○○ 사단이 실세라느니 하는 말들이 나온다. 19년 전 일그러진 사법부의 모습에 통탄하며 고뇌하던 초심을 되돌아볼 때이다.

김정훈 사회부 차장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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