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윤재]말과 일에 충실한 대통령을 기대하며

  • 입력 2006년 12월 27일 03시 00분


코멘트
국가를 경영하는 정치리더십의 핵심은 ‘말과 일’이다. 호머는 일찍이 훌륭한 사람이란 “좋은 일을 하고 선한 말을 하는 사람”이라 했고, 공자도 군자란 “말에 신중하고 일에 민첩한 사람”이라 했다. 덩샤오핑도 국가적 인물들을 말과 일의 능력에 따라 말과 일을 다 잘하는 국보(國寶)형, 말은 좀 못하나 일은 잘하는 국재(國才)형, 말과 일을 다 못하는 국폐(國廢)형, 말만 번지르르하게 앞세우는 국요(國妖)형으로 구분했다.

국가경영 과정에서 말과 일은 사실상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말을 잘하는 것은 실천과 경험을 넉넉하게 지닌 인물이나 할 수 있고, 일을 잘하는 것 역시 적절한 말을 통해 상호교감을 형성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년 대선에서는 수기(修己)와 경륜이 충실한, 그래서 ‘말과 일에 다 능한’ 국보형에 가까운 인물이 당선됐으면 좋겠다.

말과 일에서 소임을 다할 수 있는 대통령이란 어떤 사람일까? 조작적 개념(operational conception)을 활용해서 말한다면 “공직 등을 맡아 성공적으로 일해 본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정책을 면밀하게 연구하고, 기획·집행하면서 땀 흘려 봉사해 본 경험이 많은 인물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가 ‘한국에는 일 잘하는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이나, 이스라엘의 학생들이 국회를 견학할 때 회의장만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상임위원회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실제로 국가예산안을 짜 보는 것 등은 정치란 무엇보다 말이 절제되는 가운데 구체적인 일로써 나라 살림을 꾸려 가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세종도 초기 4년 동안 아버지 태종을 상왕으로 모시면서 정치 수습(修習)을 했다.

“한국엔 일 잘하는 대통령 필요”

그러나 우리 정치는 정치인들로 하여금 말과 일이 적절하게 조화되는 가운데 국가를 경영하는 실력을 차분하게 기르고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대통령제의 부정적 영향이다.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은 비록 탈권위주의적이라 할지라도 권력의 핵이다. 따라서 막강한 대통령의 지위는 뭇 정치인들의 성취 목표다. 정치 초년생조차도 어느 정도 능력을 보인다 싶으면, 즉시 ‘대권주자’로 나서서 ‘대권정치’에 휩쓸리다 보니 정책 연구와 리더십 훈련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다.

둘째, 우리 정치는 지나칠 정도로 격화된 이념 대립과 노선 투쟁으로 정치운영과 정책개발에 심대한 비효율이 일상화돼 있다. 이에 따라 국가이익을 고려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그에 따른 대승적 협상보다는 권력게임과 이데올로기 경쟁 차원의 천박한 현실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들이 국가보다는 당을, 당보다는 파벌을 더 의식하는 편협하고 비전 없는 정치가 이어지고 있다.

셋째, 건전한 정치교육의 부재(不在)다. 우리 정치가 국민에게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한 건강하고 실용적인 정치교육만이라도 충실하게 제공했더라면, 그런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정치 3류’를 타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다. 선진국에서 정치교육은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실천되는 국가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것은 독재정치의 소산쯤으로 폄훼되거나 불필요한 국가주의 교육으로 인식돼 왔다. 대학의 모의국회조차도 진지한 정책토론보다 코미디식 에피소드 모음에 불과했다.

목청 높은 후보에게 속지 말아야

이처럼 우리의 정치 환경은 정치인들이 말과 일에서 능력과 수범을 보이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을 만한 정치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매우 부정적이다. 그래서 대선을 1년 앞둔 요즈음, 정치인들은 또다시 이합집산, 신당 만들기, 무슨무슨 작전에 귀를 세우고 발품을 파는 데 정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진귀한 진주는 바닷모래에 오래 시달렸던 조개가 만들고, 단아한 연꽃은 진흙 밭에서 피어난다. 우리는 여러 차례의 정치적 혼란과 불행을 거치면서도 근대화와 민주화를 성공시킨 모범사례로 평가되는 정치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이런 조악한 정치 환경 속에서도 내년만큼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목청을 높이는 후보보다 말과 일 양면에서 검증받고 꿈을 키워 온 인물들이 더 드러나고 평가받기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정윤재 객원논설위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tasari@aks.ac.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