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게임의 법칙

  • 입력 2006년 12월 19일 19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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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3월 12일 밤 신한국당 출입기자들은 속이 탔다.

내일이면 신한국당 새 대표가 발표되는데 잡히는 게 없었다. 신한국당 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은 이미 새 대표에게 내정 사실을 통보했을 터. 밤 12시가 다 돼서야 ‘이회창 고문’이라는 얘기가 돌자 기자들은 우르르 이 고문의 종로구 구기동 자택으로 몰려갔다. 늦게 귀가하는 이 고문은 문 앞에서 기다리던 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니라니까….”

이 고문은 다음 날 신한국당 전국위원회에서 새 대표로 선출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쪽’으로 불리며 타협과 거짓을 거부하는 깨끗한 이미지의 이회창 씨가 ‘적어도 거짓말은 안 한다’는 자신의 ‘아름다운 원칙’을 깬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승부욕 때문이었다.

당시 신한국당엔 ‘9룡’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대선주자가 난립했지만 승부욕에 관한 한 이회창 씨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대부분의 주자들이 김영삼 대통령의 ‘낙점’만 기다린 데 반해 그는 ‘탈당 불사’로 김 대통령을 압박해 대표직을 따냈다.

그러나 그는 승부욕에 비해 승리를 위해 다걸기(올인)하는 승부사 기질이 모자랐다. 맞붙었던 김대중, 노무현 후보가 ‘DJP 단일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이루었지만 그는 ‘이인제 주저앉히기’와 ‘JP와의 연대’ 기회를 사실상 스스로 차 버렸다.

이회창 씨가 패한 다른 요인은 주군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가신그룹의 부재였다. 김대중 후보에게는 동교동계가,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386그룹이 있었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 주변에는 대선 후 논공행상을 노리는 이들만 북적거렸다.

이는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었다.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 않고, 쓴 뒤에는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데 반대로 했던 것. 아직도 측근들을 몰고 다니는 전두환 전 대통령도 어색하지만, 단신으로 강연에 나가 ‘순신불사(舜臣不死)’를 외치는 그의 모습은 안쓰럽다.

이회창 씨의 또 다른 패인은 당보다는 후보 중심으로 선거를 치른 것이었다. 두 번의 선거에서 약자였던 김대중 후보의 국민회의와 노무현 후보의 민주당은 똘똘 뭉쳐 후보를 밀었다. 반면 1997년 신한국당은 끝까지 내분이 가시지 않았고, 2002년에는 이회창 후보의 가족 그룹이 사실상 선거운동을 접수해 한나라당을 들러리 세웠다.

그의 패인을 두고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비롯해 갖은 해석이 나오지만 이처럼 기본적인 전열조차 갖추지 못한 채 벌인 대결의 결과는 뻔했다는 게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사람들의 얘기다.

대선이 딱 1년 남은 오늘, 벌써 이회창 씨의 실패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하는 조짐들이 보인다. 어떤 주자는 대선에 다걸기할지가 의심된다고 하고, 지지율이 높은 어느 주자 주변에서는 자리다툼이 벌어진다는 얘기도 있다.

무엇보다 한나라당에서는 당보다 후보 중심으로 선거를 치르려는 고질병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회창 씨의 측근이었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왜 한나라당이 아닌, 주자 개인이 공약을 앞세우느냐. 한나라당 주자들이 당 밖에서 싸울 때 여당은 당을 전투대형으로 만들고 있다. 주자들이 당 내로 들어와 처절히 맞붙고, 검증 받으면서 이슈를 장악하지 못하면 또 한 번의 패배가 기다릴 뿐이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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