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딱한 대통령

  • 입력 2006년 12월 1일 20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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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한 대통령이다. 평양의 선군(先軍)주의자들은 핵보유국을 자랑하는 플래카드를 치켜들고 있는데 남한의 대통령은 ‘내부의 적(敵)들’에게 굴복했다며 “임기 못 마치는 첫 대통령이 안 됐으면 좋겠다”고 푸념한다. 정 수틀리면 언제라도 하야(下野)하겠다는 소리 같은데, 그 비슷한 소리를 하도 여러 번 들어온지라 사람들은 대체로 눈살을 찡그리거나 혀를 차고 만다. 하물며 하루가 지나면 다시 “임기가 얼마 안 남았느냐. 그렇지 않다”고 딴소리를 하니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10명 중 9명이 등 돌렸다

2006년 12월, 한반도의 기상도는 ‘매우 흐림’이다. 평양정권은 실패한 세습체제를 핵으로 지켜 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6자회담이 재개(再開)된다지만 “핵 포기하려고 핵 만든 것 아니다”는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의 공언(公言)처럼 그들이 선뜻 핵을 폐기할 리는 없다. 남한 정부가 어떻게 해볼 뾰족한 수도 없어 보인다. 말로는 북핵 불용(不容)이라면서도 행동으로는 용인(容忍)인 듯싶으니 문제 해결의 지렛대 역할은커녕 관찰자 역할로 밀려날 판이다.

이 통에 죽어나는 것은 북한 주민들이다. 300만 명이 굶어 죽은 1990년대 중반의 ‘고난의 행군’에 이어 이번에는 ‘피의 행군’이 강요될 것이라고 한다. 또 얼마나 많은 노약자 어린이가 희생될 것인가. 북핵을 용인할 수 없는 이유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남한은 민주화 이후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교착(膠着)상태에 빠져 있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는 지역 정권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노무현 정부는 이념 과잉(過剩), 능력 부족에 독선과 오만이 겹치면서 ‘민주화의 위기’로까지 후퇴했다. 안보에서 경제, 교육, 주택 문제에 이르기까지 정책 혼선과 실패가 거듭되고, 그에 따른 사회적 갈등과 분노가 증폭되면서 과연 무엇을 위한 민주화였는가라는 회의(懷疑)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관리해야 할 정치적 리더십은 오히려 분열의 복판에 서 있다. 딱한 대통령이다.

국민 10명 중 9명이 등을 돌린 ‘참여정부’다. 대통령이 하야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다. 그러나 5년간 국정을 위임한 국민이 요구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하야할 수 없다. 이는 흔들려서는 안 될 헌정 질서다. 재작년 탄핵사태 때 형식이야 헌법재판소의 결정이었지만 실제 대통령을 구한 것은 헌정 질서를 지키려는 다수 국민의 뜻이었다. 대통령의 잘못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탄핵 이후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우려한 민심이었다.

2년 반 만에 그런 민심은 거의 사라졌다. 대통령이 정말 하야한다고 해도 말릴 국민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가 말려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나라와 국민에 대한 의무와 무한책임을 생각한다면 함부로 하야 소리를 입 밖에 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걸핏하면 대통령 직을 가볍게 보는 발언으로 스스로 국민의 신뢰를 잃었으니 참으로 딱한 대통령이다.

KBS 사장 정연주 씨의 ‘역주행 출근’은 현 정권에 민심이 등 돌린 이유를 희화적(戱畵的)으로 보여 준다. 국민은 정 씨의 역주행 출근에서 대통령의 역주행을 읽는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국민 뜻 따르는 게 順理

이제 노 대통령은 ‘역주행의 오기(傲氣)’를 제발 버려야 한다. 어차피 여당과 갈라서야 할 것이라면 하루빨리 정리하고, 남은 1년 여 임기 동안 국민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다수 국민이 ‘북핵 폐기 없이 포용 없다’고 하면 포용정책을 유보해야 한다. 북이 핵실험까지 한 마당에 ‘낭만적 대북(對北) 인식’의 소유자를 통일부 장관에 앉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하면 바꿔야 한다. 전체 직원의 80% 이상이 반대한다는 KBS 사장은 자진 사퇴로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 줘야 한다.

이것은 굴복이 아니다. 상식이고 순리(順理)다. 여기에 엄정한 법치(法治)로 민생을 돌본다면 누가 딱한 대통령이라고 하겠는가. 대통령이 딱한 것은 그렇다 쳐도 나라까지 더는 딱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교착상태를 풀지는 못할망정 더 악화시키지는 말아야 한다. 그런 다음 퇴임해 봉하마을로 돌아간다면 나라와 대통령 모두에게 그나마 다행일 터이다. 머뭇거려도 될 만큼 임기가 많이 남은 것은 아니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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