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함인희]시위 삼강오륜

  • 입력 2006년 11월 1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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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세계 유수의 컨설팅 기관에서 국가별로 연상되는 대표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 미국 하면 할리우드 영화, 프랑스 향수, 독일 ‘쌍둥이’ 칼, 이탈리아 핸드백, 그리고 스위스 하면 명품 시계가 떠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한데 유감스럽게도 한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채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노사분규 현장이라고 답했다 한다. 우리네 시위 현장의 과격성이 대한민국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주뼛해 온다.

한국 대표 브랜드가 과격시위라니

하루가 멀다 하고 진행되는 도심 집회와 시위로 크고 작은 불편을 감내해 온 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터에, 마침 전의경 부모모임을 주축으로 평화적 집회 시위 정착을 위해 ‘시위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제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반가움이 앞선다.

혹여 삼강오륜이란 표현에 과거로의 복귀인가 의구심을 드러낼 이도 있을 테지만, 사람의 도리와 삶의 기본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받아들임이 정도인 듯싶다. ‘평화적 시위문화에 앞장선다’, ‘시민의 도시생활권을 존중한다’, ‘집시법을 비롯한 관련법을 존중한다’는 삼강, ‘원활한 교통 소통에 협조한다’, ‘소음을 최소화한다’,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않는다’, ‘집회 현장을 깨끗이 정리한다’, ‘경찰을 집회시위의 조력자로 인식한다’는 오륜에 구구절절이 공감한다.

돌이켜보면 우리네 시위문화의 과격성과 폭력성은 권위적이고 억압적이던 구시대 상황에서 파생된 유제였다. 사회질서의 핵심이라 할 권력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중재할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상황에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으며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게 마련인 관행이 자리를 잡아 왔다. 그런 만큼 공적 권위에 도전하려면 필요 이상의 과격함으로 무장해야 했고, 그럴 때만이 시위의 가시적 효과를 극대화하여 성과를 거두어 내는 악순환이 이어져 왔다.

이제 경제 성장과 정치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 낸 ‘자랑스러운 국가’란 평판을 받고 보니, 도심 시위가 일상의 익숙한 풍경으로 자리 잡아 온 현실이 일면 역설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 덕분인가, 최근 들어선 시위의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될수록 시위 형식이 더욱 과격해지는가 하면, 평화적 시위가 우발적 폭력을 불러일으켜 불의의 사상자를 내는 경우 시민들로부터 따가운 비판의 눈총이 쇄도하기도 했다.

1980년대 말 미국 유학시절 당시 매우 인상적인 시위를 목격한 적이 있다. 국가가 책임을 회피하고 관리를 소홀히 한 결과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자, 에이즈로 사랑하는 자녀와 부모, 친구, 애인을 잃은 가족들이 이들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내용을 담은 가로세로 1m의 퀼트를 이어 초대형 퀼트를 만들었다. 뜻있는 이들이 미국 전역을 돌며 퀼트 전시회를 기획하고 평화로운 피켓 시위를 병행하면서, 국가 차원의 에이즈 치유책 마련을 호소했다. 이들의 시위와 전시는 시민들의 마음을 소리 없이 움직였고, 더는 억울한 죽음을 방치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가져왔음은 물론이다.

폭력의 악순환, 이젠 끝낼 때다

우리의 시위문화도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걸맞게 업그레이드해야 함은 더 미룰 수 없는 과제인 듯하다. 시위로 도심교통이 마비되는 동안 가장 선의의 피해자는 하루 벌어 하루 생계를 이어가는 서민들이요, 불안한 심리에 지갑을 닫는 이들이 늘어나는 순간 경제불황의 타격을 입는 이 또한 서민들임을 잊어선 안 되리라. 앞으론 시위 자체가 목적이 되기보다, 부정의한 제도가 교정되고 부당한 차별이 시정되며 소수집단의 권리가 보상받는 시위 본연의 목적이 충족되길 희망한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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